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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Sep 20. 2021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을 때 듣는 노래

DAY6 <좋아합니다>


   DAY6라는 밴드가 있다. 원더걸스, 트와이스, 2PM 같은 걸출한 아이돌 그룹을 내놓은 JYP 엔터테인먼트가 기획한 밴드다. 6인조 밴드로 시작해서 ‘DAY6’라는 팀명이 붙었지만 멤버 하나가 빠지게 되면서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바와 달리 기타 두 명, 드럼, 키보드, 베이스로 이뤄진 5인조 밴드가 되었다. 락 음악을 좀 너무 진지하다 싶은 자세로 섬기는 로키즘(Rockism)과 ‘락? 그게 뭔데?’라는 무심함으로 무장한 케이팝이최고이즘 사이에서, 아마 ‘아이돌 기획사 출신인데 꽃미남도 아닌 밴드’ DAY6는 양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2015년 당시 그들의 데뷔곡 <Congratulations>가 듣기 좋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케이팝도 락도 열심히 듣지 않는 고3이었다.

  DAY6가 내게 미온적인 호감을 남긴 이유는, 물론 첫째는 음악이 듣기 좋아서였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이 나에 대해 딱히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리스너도 팬도 아닌 상태가 좋았다. 특별하고 고매한 척하는 락 리스너도, 가수의 성패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투표든 음원 스트리밍이든 앨범 구매든 뭔가를 끊임없이 열심히 하는 아이돌 팬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좋아하는(그래봤자 소비하는) 음악’ 따위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고 드러내려는 시도가 멋없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실 나는 나만 빼고 신나게 뭔가에 몰입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그냥 짜증났던 것도 같다. 리스너든 팬이든 되기 싫은 게 아니라 어느 것도 될 능력이 없는 내가, 타자를 향해가는 사랑 에너지를 부족하게 타고난 내가 나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결국 모두를 부정하는 ‘쿨병’이었을지도 모른다.


  2017년에도 DAY6는 여전히 평단의 호평을 받거나 열성적인 팬덤을 모으진 않은 상태였다(적어도 그들의 행보에 얕은 관심만 갖고 있던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랬다). 그동안 그들은 여러 곡을 냈고 나는 열없이 어떤 곡은 듣고 어떤 곡은 듣지 않았다. 데뷔곡만큼 마음에 쏙 드는 곡은 없었다. 그러다 그 해 겨울 <좋아합니다>라는 곡이 나왔다. 다 듣지 못하고 노래를 껐고, 그 곡을 기점으로 DAY6에 대한 관심도 완전히 끊게 되었다. 

  해도 해도 너무 구렸다. 대충 구리면 웃기기라도 했을 텐데, 구린데 기합이 너무 들어가서 참기 힘들었다. <좋아합니다>라는 제목이 일단 그렇다. 세상 어떤 미친 사람이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서 마음을 전한다는 말인가? 그건... 너무 격식이라 오히려 현실 같지가 않았다. 또 어떻게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밴드가 감히 “살다 보면 맘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죠”라는 (왠지 문법도 어색한) 가삿말로 노래를 시작한단 말인가? 대체 이들은 왜 후렴구에서 좋아합니다아아아, 라고 고음을 내지르며 열창을 한단 말인가? 노래방 인기 탑텐 발라드를 부르는 촌스러운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작위적인 노래를 좋아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나는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에서 내가 이 노래를 하루종일 들으면서 질질 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날 나는 홀린 듯이 DAY6의 콘서트 라이브 영상을 보다가 이 노래의 진지함에 몰입했다. 좋아합니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가사를 땀에 젖은 젊은 얼굴이 너무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락스타답게 멋에 취해 있다거나 무대 매너가 훌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책상 앞에 여덟 시간을 꼬박 앉아있는 수험생처럼 어딘가 뻣뻣했다. 그래서 완고하고 당당해보였다. 그는 정말 자신이 쓴 가사가 하나도 안 부끄러워 보였다. 오히려 이 말을 꼭 전해야겠다는 듯 관객을 형형하게 노려보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한테 분명히 말을 걸고 있었다. 들으라고, 내 말을 들으라고. 그래서 그 말이 나한테도 결국 전해졌다. 그 메시지를 누구보다 크게 비웃을 자신이 만반했던 내게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 용기와 힘이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다 까보이고 말을 전해 진심을 이해시키는 그 힘이.

  나는 온 평생을 남에게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살아왔는데, 내 말과 글에는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우리를 얘기하기보다는 나를 주장하고 싶었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냥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나에 대해 얘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나의 이기성을 훌륭한 글솜씨나 말솜씨를 갖춘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내 얘기만 하는 사람이여도 사람들이 나를 궁금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가 송두리째 깨진 것은 언어를 뺏기고 나서였다. 미국에서의 일이다. 나는 미국에 왔는데 영어를 못했고 그래서 멍청한 나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쉴 새 없이 떠오르고 그걸 바로 입 밖으로 뱉는 게 익숙했는데, 영어로는 그게 쉽지 않았다. 내게는 정말 말과 글과 생각밖에 없었는데 누가 그걸 갑자기 뺏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휴양 도시, 해변과 노을이 아름답다는 샌디에이고까지 가서 햇빛도 안 들고 환기도 안 되는 구린 방에 날 가뒀다. 밖에 나가면 어정쩡하게 굳어버린 나를 스스로 너무 의식하게 되어 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서 멍청한 내 모습을 들키는 게 싫었다.


  몇 달을 침대에 누워 낯선 패배감을 곱씹는 동안 나는 남들이 나에 대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뼈저리게 이해했다. 미국에 가기 직전 나는 공부 공동체에서 “네 글은 재밌긴 한데 다 비슷해서 다음 글이 기대되지 않는다”, “너는 항상 겪은 일이 아니라 네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에 대해 쓴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늘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떠드느라 바쁜데, 남들은 그게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같고 솔직히 관심도 안 간다는 뜻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오해받는 것 같아서 억울했다. 그 다음엔 그 말이 너무 매정한 것 같아서 분이 났다. 그런데 ‘내가 정해놓은 내 모습’에서 조금 삐끗하니까 바로 숨어버리는 스스로를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는 늘 비슷하고 변하지 못한다. 변함없이 ‘내가 생각하는 나’가 되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애쓰기 때문이다. 또 나는 나 아닌 남과 관계 맺지 못한다. 남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마냥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꾸 그게 아닌 내 모습을 들켜야 하는데, 나는 그게 어쩌면 혼자가 되는 것보다 괴롭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말과 글을 남에게 전하려면 반드시 ‘잘’ 해야한다고 믿었다. 콧방귀가 나오는 “좋아합니다” 같은 가사보다야 잘 쓰려고 아득바득 노력해서 나오는 내 글이 전달력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잘’ 쓰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좀 더 재밌게, 좀 더 세련되게, 좀 더 강렬하게... 

  그러나 사실 어떻게 쓰였든 간에, ‘나’를 우기기 바빠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 내 글은 남들 입장에서는 사실 마지못해 받아드는 전단지 같았을 것이다. 반면 그날 내가 본 DAY6는 ‘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들은 “참으려 해봤지만 더는 안 되겠”을 정도로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남에게 관심을 갖고 말을 건네고 연결되려는 마음은 눈속임 같은 기교를 이긴다. <좋아합니다>는 ‘잘’ 만든 노래가 아니라고 팔짱 끼고 듣고 있던 나까지 몰입하게 만든 건 결국 “타자를 향해가는 사랑 에너지”였다.

  그 날 나는 <좋아합니다>를 하루종일 틀어놓고 침대에서 온종일 누워있었다. 그냥, 그 말을 믿고 나니 ‘좋아합니다’는 더없이 감미로운 말이 되었다. 내가 나를 온전히 좋아할 수 없는 시간들 속, 나는 <좋아합니다>를 듣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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