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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Oct 08. 2019

문득 사랑 없는 내 삶이 무서워질 때

한 새벽의 불안 증세

    



"내가 술 마시면 불안증이 심해져서 잠을 잘 못 자거든. 미안한데 네 방에 가서 같이 자도 괜찮을까?"


       불금은 가시어가고, 토요일 새벽 2시였다. 나는 아직 친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일본인 친구에게 다다다 문자를 쳤다. 평소였으면 절대 안 했을 짓이었는데, 술을 마신 후라 모든 행동이 한 템포 빠르고 충동적이었다. 내일 존나 후회하면서 일어나겠지… 메시지를 보내놓고 몽롱한 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하면 뭐하냐고. 취한 사람에게는 생각이라는 게 마땅한 구속이 되어주지 못하는데. 생각을 할 거면 이렇게까지 취하기 전, 아까 아까 한참 전부터 했어야 했다. 옷 입는 게 좀 괜찮다 싶었던 대만 남자애한테 쓸데없이 친한 척 했던 것, 딱히 재밌지도 않았던 걔랑 따로 나와서 오래 수다 떨었던 것, 난 강아지 무서워하는데 걔가 키우는 개 사진 보여주니까 너무 귀엽다고 껌뻑 죽는 척한 것, 걔가 내 허리에 손 두를 때 의식해놓고 별 말 하지 않은 것, 그 남자애와 나를 장난 삼아 엮어대는 취한 사람들 말에 역겹게 수줍은 척 걔 등 뒤로 숨은 것, 헤어지는 순간 걔가 키스하자고 분위기 잡았을 때 머뭇대다 볼에다 뽀뽀를 했던 것. 아 딱히 진심 아니었던 그 모든 것들이여…. 술 취해서 멍청해진 머리로도 실컷 후회할 수 있을 정도로, 이것 저것들이 모두 개에바였다.


       내 이불을 한아름 껴안고 친구 방에 갔을 때, 친구는 졸린 눈을 하고서도 나 누우라고 에어매트리스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겸연쩍고 미안해서 나는 아무 데서나 잘 잘 수 있다며 바람을 더 넣어야 한다는 친구를 말렸다. 섣부르게 바람이 덜 들어간 매트리스 위에 누우니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바닥이 심하게 꿀렁거렸다. 친구말 들을걸, 이러다간 자면서 토하는 거 아닐까. 몇 년 전 본 웹툰의 남자 주인공은 자던 중 토를 해서 질식사했던 대학생 귀신이었는데… 취한 상태로 자려고 누우면 습관처럼 복기하게 되는 죽음 시나리오. 나는 고개를 가만히 옆으로 고쳐 뉘었다.


       뜬금 없이 죽음이 불안해질 때는 이제 의연하게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죽음보다 무서운 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벌여놓는 짓거리다. 나는 잠든 친구 옆에서 모든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술이 깨갈 수록 가장 후회가 되었던 건, 그 남자애 앞에서 유치하게 연애 흉내를 내고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적잖이 후회가 됐지만) 혼자만의 감정에 겨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들갑을 떨며 메세지를 남겼던 점이었다. 친구들은 늦은 밤에도 사려 깊게 앞뒤 다 잘라먹힌 내 요란법석을 들어주고, 불안해서 잠에 못 들겠다고 징징대니 자기 방문을 열어줬다. 내 막무가내의 행동이 그들에게 얼마나 피로한 일이었을지 술이 깨고 나서야 뒤늦게 자각하게 되었다. 와, 못 견디게 창피하고 자괴감이 들었는데, 제일 큰 문제는 이런 일이 예전에도 지겹도록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또 그랬던 거다. 혼자만의 감정에 겨워서 친구들이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을 우수수 쏟아내기. “로맨스 못하겠어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게 연애냐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스스로가 너무 같잖고 우스워서 화가 난다 나는 그냥 외롭게 늙어죽을란다…” “얘 목적은 나랑 섹스하는 거고 내 목적은 얘랑 섹스 안 하는 선에서까지 연애 기분 느끼는 거고 애초부터 종착지가 엇갈리는데 뭐하러 이 짓을 계속하지" 인터넷 세계에서 물려받은 냉소적이고 호들갑스러운 말투, 단발적인 감정 토로가 이곳 저곳의 채팅방에 흩어졌다. 그 순간 나는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어도 그들과 소통이 되고 있는지 어쩐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다다 화풀이하 듯 타자를 쳤을 뿐. 그 결과 채팅방을 수다스럽게 채웠던 건 나도 남도 아무도 이해시킬 수 없는 말들이었다.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한 감정을 남들이 알아줬으면 해서 섣부르게 쏟아내는 나는 나약하다. 그러면서 철저히 솔직해지지도 못해서 과장스러운 인터넷 말투로나 일관한 점은 더 우습다. 나는 가끔씩 내 날 것의 감정을 쏟아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친구 사이가 깊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내가 성급하게 감정을 털어내려고 했을 땐, 솔직해지기보단 버릇처럼 굳어진 위악적이고 냉소적인 말투만 튀어나가지 않았던가. 상대와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맥락이 모조리 탈각된 거친 감정 표현들만 남는다. (자주 쓰는 몇 마디, 같잖고 우습고 죽고 싶어!) 그러니 내 착각과는 달리, 누군가와 진솔하게 소통하기 위해선 마구 말을 쏟아내는 것 이상의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거다. 감정이 송곳처럼 튀어나왔을 때, 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차근차근 따져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마나한 말, 을 요란스럽게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배설해버릴 뿐 소통과 이해를 바라지 않는 이 화법이 내 주변 관계를 경직시켜 나를 외롭게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새벽 문득 치솟았던 격한 감정의 원인을 해체해보고 싶다. 다른 말로, 소통 가능한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거다.


       사실 건조하게 바라본다면 그날 있었던 일은 아주 시시하게 요약된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술을 좀 마셨다. 저 정도면 괜찮네 싶었던 남자애랑 농담 따먹기를 좀 했다. 대화를 하는 중 뭔가 지루하고 답답했지만 술기운을 빌어 즐거운 척했다. 걔는 지네 방으로 같이 가자고 했고, 난 그걸 거절하고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날 폭력이나 위험, 혹은 진한 실연의 아픔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에라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불안감에 젖게 된 걸까? 이 밋밋한 사건에 왜 나는 그렇게 격하게 부딪히게 된 걸까? 그건 내가 가지고 있던 특유한 욕심과 걱정과 전제들 때문이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알고 싶고, 그러기 위해 연애를 시작하고 싶다. 그날 내가 불안해졌던 건, 내가 앞으로도 좀처럼 연애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삭제 202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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