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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딛우 Jun 12. 2024

그냥 네 '기분'에 선택되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내가 곧 죽어도 얼마든지 싫을 수 있다는 걸

고등학교 때였나, 꽤나 상처로 기억 남은 경험 하나.


다니던 학원에 다른 학교의 친구가 먼저 다가와선 유난히 나를 챙겨주곤 했다.

그 친구와 친해진 계기가 뭐더라, 떠올리자면.


같은 학교의 친구 A와 그 다른 학교 친구 B는 내가 학원을 등록하기 전 먼저 같이 다니며 친해진 사이였고,

이후 내가 학원을 다니면서 뭐,  자연스레(?) 그 두 사람과 엮일 일들이 생기곤 했던 거 같다.


그 친구 B는 작고 말 수가 적으며, 예민했다.

그러나 툭툭 던지는 무신경한 듯한 말들에 적절한 유머도 있었고 성정이 냉한가 싶다가도

주변을 잘 챙기는 마음씨가 꽤나 다정스러운 아이여서 학원에서도 여러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나에게도 그랬다, 한동안은.


여느 때와 같이 친구 B와 학원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같이 떡볶이도 사 먹으러 나가곤 하면서 별일 없이 지냈다.


그런데, 이쯤 나와줘야 하는  '그러던 어느 날'


그래, 그 문제의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시기도 정말 뜬금없는 그냥 많은 날 중에 어느 날이었다.

당시의 내겐 정말 벼락같은 일이었다.


별다름 없이 학원에 가 늘 내 옆자리에 있던 친구 B에게 인사를 했는데 내 인사를 받지 않는다.

작은 물음표 '?' 정도가 머리 위로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기에, 난 익숙하게 학원 교재를 챙겨 친구에게 다시 다가갔다.

하지만, 다른 친구와 섞여 대화를 하는 중에도 그 친구는 내 말에만 반응하지 않고 내 쪽으론 시선도 주질 않았다.

그걸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둔해 빠진 난 그제야 심각성을 알아챘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그 친구가 아닌, 나에게.


그래서 난 그 친구의 기분을 되돌리려고. 무던히 신경을 쓰고 노력을 했다.

문자도 보내고, 편지도 전하고, 다른 친구를 통해 이야기를 해보려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 친구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끝내 받아낸 대답 하나는 '나 너한테 화난 거 없는데?'라는 정말 무감한 한 마디였다.

다른 친구들도 도통 모르겠다며 당황해했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다.

백날 천 날을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단절이었다.


너무 속상하고 상처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문득 그 일을 떠올리고 나니 시무룩해진다.


시간이 꽤 지나고, 학원에서 외부로 나가 보는 시험이 있던 날.

그 친구와 우연히 같은 시험장인 걸 알았다. 그 친구가 있는 걸 의식했지만, 최대한 그렇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험은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꼭 무언가 잘하고 싶은 순간, 신은 위기를 주고 싶으신지

말없이 자리에서 시험 준비를 하던 내게, 굳이 멀리 있던 그 친구가 다가왔다.


'시험 잘 봐.'라며 유리병에 든 알로에 주스를 건넨다.


그 친구의 탓은 아니겠지만, 그날 난  제대로 시험을 망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오히려 깨달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잘못한 게 없다는 걸.

그 친구 때문에 수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탓하며 고민했던 지난날들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다시 쭉 떠올렸다.


그 친구는, 그저 문득 나에게 잘해주고 싶은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나와는 특별히 우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 아닌, 자신의 '기분'을 기준으로 날 선택한 것뿐이라는 것.


쉽게 말해, 내키는 대로.

그 친구에게 나는 얼마든지 그래도 좋을 대상이었던 거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내게 흥미가 떨어진 게 다였을 테다.

흥미가 떨어진 장난감을 곁에 둘리 없으니, 무시를 했던 건데.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하거나,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다는 둥 온갖 기억들을 끄집어내

내 스스로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 검열했다. 이미 내게 흥미가 떨어진 그 애를 더 진저리 나게 했을 것이다.


친구B는 문득, 시험장에서 날 보고 나니 다시 확인하고 싶었을까.

자신이 건네는 음료수를 받아드는 내 표정을 보며 느끼는, 남은 모를 저만의 우월감 같은 것.


그 이후로, 나는 내게서 돌아선 것들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물론 한 번에 그게 될리 없었다, 이후로도 쭉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테고, 그 때마다 연습이 되었겠지.

내가 잘못을 했던, 아니던 누군가는 내가 곧 죽어도 얼마든지 싫을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으니까.


그리고 최근, 난 또다시 같은 경우에 놓였다.

약간, 이젠 정말 이런 타입에게 제대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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