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끝판왕 미국 북부의 가을
봄이 가면 여름, 가을 그렇게 겨울.
유년 시절엔 계절의 흐름이 이렇듯 특별한 선물인 줄 몰랐다. 일상을 지배하는 단위는 학기와 방학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교복을 벗어던진 스무살 이후로는 철마다 옷을 장만하는 즐거움으로 그 변화를 즐겼다. 이상하게도 늘 옷장에는 입을 옷이 없었고, 유행을 좆느라 계절이 어떤 미세한 변화를 겪는지, 계절과 계절이 교차하며 잉태하는 자연의 미세한 떨림을 섬세히 느껴볼 틈이 없었다. 그보다는 벚꽃 아래 데이트가, 여름밤 바닷가 엠티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이 더 신났던 청춘이었다. 서른은 학기도 방학도, 트렌디한 옷과 설레던 연애... 그 무엇으로부터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시대였다. 오로지 월간지를 만들기 위해 남보다 몇 달 앞서 계절을 살아야 했던 그 시절에는 사회에서의 생존이 단 하나의 목적이었다. 공원 산책 한번 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새벽까지 철야근무를 하면 주말에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거나, 열흘 간 배달음식을 시키며 마감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여의도 벚꽃도, 설악산 단풍도 시든 뒤였다. 세상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는 사이, 나의 4월과 7월, 11월 같은 시간들은 잠시 정지되어 있고는 했다.
미네소타의 시월은 매일매일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색으로 말하는 시간들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면 밤이슬과 찬바람을 맞고 밤새 한뼘이나 깊어진 단풍이 도시 전체를 물들인다. 캐나다 국경을 마주한 미국 최북단의 춥고 시린 땅이지만, 역으로 그 계절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극적이다. 굳이 멀리 나갈 필요도 없다. 그저 집 앞 놀이터, 나무가 드리운 곳이라면 샛노랗고, 노랗고 푸르고, 푸르며 빨갛고, 샛빨간 가을빛에 집에 갇혀 보내야 했던 올해의 잔인한 시간들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랄까. 이곳 미네소타 사람들이 자주 쓰는 a true fall color가 시월 한 달 내내 우리 일상을 조금씩 특별하게 바꾸는 경험은 섬세해서 더욱 특별하다.
가을의 빛깔은 식탁 위에도 고스란히 오른다. 양 팔을 둘러 간신히 품에 안아야만 들 수 있는 큼지막한 늙은호박들이 재래시장과 마트, 공원과 농장 가득 나뒹군다. 시월의 마지막, 할로윈을 맞아 9월 말부터 일찌감치 출하되기 시작하는 호박들은 미국 가을의 상징적 아이콘인 듯 하다. 왠만한 크기의 호박이 단 돈 5달러. 아이들은 이 호박 한 덩이를 놓고 둘러앉아 단면을 자르고, 씨를 파내고, 할로윈 호박조명 '잭 오 랜턴(Jack O'Lanterns)'을 만들며 수확의 기쁨과 자연의 순환을 배운다.
매일 같이 마트와 재래시장을 탐험했다. 떠나가는 가을을, 곧 시작될 반년 간의 긴 겨울을 보내기 전 찬란한 시월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지. 서로 얘기 나누는 대화의 기쁨과 다양한 표정을 잃어버린 이 무감각의 시대에서 이보다 솔직하고 드라마틱한 색의 변화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사부작 사부작, 신발 아래 닿는 마른 낙엽의 바스락대는 소리조차 여행지의 산책이 되고, 1달러에 구입한 주황색 펌프킨이 적막한 집에 컬러를 입힌다.
가을을 수학하기 위해 미네소타 사람들은 시월이면 호박농장(pumpkin patch)을 찾는다. 그곳에 새빨간 먹음직스런 사과와 어마무시한 크기의 호박, 수학을 끝내고 둘둘 말아올린 가을 볏집, 허수아비와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옥수수 미로(corn maze)가 있다. 이렇게 적고보니 다채로운 색 만큼이나 즐길 것이 무궁무진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