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어떻게 '커다란 사과'가 되었을까?
꽤 오래 전, 소설가로 등단은 했는데 원고청탁이 없어 거의 백수로 지낼 때, 영어참고서를 출간해 소설가로 살아갈 ‘밑천’으로 삼은 적이 있었다. 맨 처음 낸 책은 주로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단어를 쉽게 이해하고 외울 수 있게 도와주는 두 권으로 된《워드테크》였고, 나중에 낸 건 취준생들의 독해실력을 향상시켜주는 《해석과 번역》이란 책이었는데, 둘 모두 대학시절 영어 과외선생 노릇을 할 때 직접 만들었던 ‘교재’였다.
소설가에서 갑자기 영어참고서 저자가 된 그 무렵, 출판사에 놀러 갔다가 출판사 직원들과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생맥주집으로 몰려갔다. 일행들 중에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원어민 저자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해거름녘에 시작한 맥주파티는 꽤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영화배우 필립 호프만을 빼닮은 통통한 미국남자가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툭 던졌다.
“Why don't you make a brief visit to the John?”
* why don’t you ~ : ~ 좀 하는 게 어때?
* make a brief visit to ~ : ~를 잠깐 방문하다
“존한테 잠깐 들르지 그래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들을 만한 단어는 없었지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뜬금없이 존이라니? 존이 누구지? 나한테 무슨 화라도 났다는 얘긴가? 이 사람, 취했나?’ 결국 나는 고개를 그의 앞으로 쑥 내밀며 물었다.
“John? Who are you talking about?”
“존이라니요? 대체 누구 얘길 하는 겁니까?”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All I know is John F. Kennedy and John Travolta. One person passed away, and one person is in your country. So I can't make a brief visit them.”
“내가 아는 존이라곤 존 F. 케네디와 존 트라볼타 밖에 없어요.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한 사람은 당신네 나라에 살고 있죠. 그러니 내가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잠깐이라도 들르겠어요.”
* John Travolta(1954- ) 미국의 영화배우
* pass away 사망하다, 돌아가시다 = die
그러자 필립 호프만을 닮은 미국남자는 키득키득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는 “toilet!”이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말한 ‘존’이 뭘 뜻하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맥주를 끝도 없이 들이키면서도 자리 한 번 뜨지 않는 나를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화장실 좀 다녀오지 그래,”라고 말한 것이었다. 숨을 좀 돌리란 뜻도 있는 듯했다.
‘John’이라는 말에 ‘화장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건,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John Crapper이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 외에도 John과 비슷한 Johnny가 남자의 성기를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John이 가장 흔한 서양남자들의 이름 중 하나라는 사실이 이유로 지목되기도 하고, 성경에서 요한(John)이 지닌 우월한 지위 덕분에 그런 영예(!)를 얻게 되었다는 불경스런 얘기도 있지만,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닌 듯싶다. 화장실을 남자만 가는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한 미국인 남자가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였다. 묘하게도 그때 역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를 꽤 여러 병 비운 뒤 “Can I use your bathroom, please?”라는 미국남자의 ‘정중한’ 물음을 듣는 순간, 몇 년 전의 생맥주집을 떠올린 나는 희죽 웃으며 그에게 던졌다.
“Why not? Feel free to use my John.”
왜 안 되겠어요, 마음껏 쓰세요.
* feel free to ~ : 마음대로 ~하라, 거리낌 없이 ~하라
그때 나는 그의 얼굴에 뭔가가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그건 그냥 ‘뭔가’가 아니었다. 기묘하고 오묘했다. 농담을 받아들이는 것 같기는 한데, 기분이 언짢을 때 드러나는 표정 같은 게 그의 얼굴을 스쳐간 거였다. 나도 역시 뒷머리를 묵직하게 누르는 ‘뭔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인가, 그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왠지 모를 부채감에 싸인 채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조심스럽게 ‘그때의 일’을 거론했다. 곧바로 온 그의 답멜에서 나는, 그의 돌아가신 부친의 이름이 ‘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가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지만 영미권(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서양)에선 사람은 물론 장소에도 별명을 붙이는 게 유별나게 발달(!)돼 있다.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게 가장 흔한 일이지만,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도 그들은 애칭(pet name)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William을 Will, Willie, Bill, Billy 등으로 부르는 것처럼 사람의 원래 이름을 줄이거나 바꾸어서 부르는 걸 hypocorism[haipɑ́kərìzm]이라고 한다. 영어식 이름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애칭들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름은 열 개가 넘는 애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Elizabeth]
Eliza, Elisa, Bess, Bessie, Beth, Betsy, Bette, Bettie, Betty, Libby, Liz, Liza, Lizzie.
[Margaret]
Madge, Maggie, Margie, Marge, Megan, Meg, Meggie, Peg, Peggy, Molly.
Bill이 William의 애칭 중 하나라는 건 워낙 유명해서 알 수도 있지만 영어권 사람이 아니고는 애칭만 보고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유추해내기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다. 이름의 중간이나 끝 부분을 이용해 만든 애칭일 경우는 "뭥미?"가 될 수밖에 없다.
Sandy = Alexander
Tory = Victoria
Fanny = Stephanie
미국인들은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라 도시의 이름도 흔히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뉴욕(New York)을 ‘큰 사과(Big Apple)’라고 부르는 것이다. 뉴욕이 커다란 사과로 불리게 된 것은 1920년대에 한 기자가 쓴 일련의 기사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The Big Apple was popularized as a nickname for New York City by John J. Fitz Gerald in a number of horse-racing articles for the New York Morning Telegraph in the 1920s.
‘빅 애플’이 뉴욕의 별명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20년대 ‘뉴욕 모닝텔레그래프’에 여러 편의 경마기사를 쓴 존 J. 피츠제럴드에 의해서였다.
* popularize 대중화하다, 보급하다 ▶ be popularized 알려지다
* a number of 얼마간의, 다수의 = a few, many
* article 신문기사; 조항; 물건; 영어의 관사(冠詞)
‘빅 애플’은 원래 보드카(vodka)에 사과를 갈거나 사과주스를 섞어서 만든 칵테일(cocktail)을 가리키는데, 하지만 피츠제럴드 기자가 뉴욕을 ‘빅 애플’로 부른 것과 이 칵테일은 관련이 없다. 그는 〈Around the Big Apple(빅애플에 대하여)〉라는 헤드라인(headline)이 걸린 1924년 2월 18일자 칼럼(column)에서 ‘백 애플’이란 말을 사용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The Big Apple. The dream of every lad that ever threw a leg over a thoroughbred and the goal of all horsemen. There's only one Big Apple. That's New York.”
빅 애플. 뛰어난 순종마(純種馬)에 올랐던 모든 젊은이의 꿈, 모든 기수들의 목표. ‘빅 애플’은 오직 하나뿐. 바로 뉴욕이다.
* lad : 흔히 ‘청년’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에 들어 있는 stable boy(마굿간지기)의 뉘앙스가 가미되어 있다.
* throw a leg over ~ : ~에 올라타다
* thoroughbred 서러브레드. 순혈종(純血種) = horse that has parents that are of the same high quality breed(뛰어난 자질을 가진 같은 혈통의 암말과 수말에서 태어난 말).
이후로 ‘빅 애플’은 뉴욕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처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뉴욕에서 열리기 시작한 만화축제의 타이틀로 사용되기도 했다.
The Big Apple Anime Fest (BAAF) was an anime convention which was held annually between 2001 and 2003 and supported by a consortium of anime and manga companies.
‘빅애플 만화축제(BAAF)’는 2001년에서 2003년까지 매년 열린, 일본애니메이션 및 만화사들이 공동으로 지원한 만화대회였다.
* convention 대회, 집회; 협정; 관습
* hold 잡다, 유지하다 ▶ be held 열리다, 개최하다
* annually 해마다, 매년 = every year
* consortium 특정사업의 수행을 목적으로 한 협력단. 컨소시엄
* anime[ˈænɪmeɪ] 일본만화영화
* manga 만화(일본어 まんが(漫画))
별명을 가진 도시는 물론 뉴욕만이 아니다. 세계 대다수의 도시는 저마다 한두 개씩의 애칭은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빛의 도시(La Ville-Lumiere)’로 불리지만 영어권 국가로부터는 ‘사랑의 도시(The City of Love)’라는 멋진 별명을 얻어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Prague)에 붙어 있는 ‘백탑의 도시(The City of Hundred Spires)’라는 애칭은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이 ‘북쪽의 로마’라고 불렀던 도시답게 유럽문화의 중심지로서 프라하의 위상을 대변하는데, ‘도시의 어머니(The Mother of Towns)’나 ‘황금의 도시(The Golden City)’ 같은 별명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Venice(베니스) : Bride of the Sea(바다의 신부)
* bride 신부 ↔ bridegroom = groom 신랑
Geneva(제네바) : The Peace Capital(평화의 수도)
Singapore(싱가포르) : The Lion City(사자의 도시)
Sao Paulo(상파울로) : Land of Drizzle(보슬비의 땅)
* drizzle 이슬비, 가랑비 = light rain
Cairo(카이로) : Paris of the Nile(나일강의 파리)
우리나라도 몇 개의 의미 있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유난히 화성에 탐닉해 언젠가 화성에 사는 사람들과 조우할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미국의 천문학자 로웰(Lawrence Lowell:1855-1916)은 19세기 말에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는 애칭을 끌어내 그의 저서 제목으로도 사용했다. 인도에서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지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는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이라고 칭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