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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리 Feb 10. 2022

순진하기 위해 용감할 수 있다면

영화 <비긴 어게인>, 2013

* 이 글은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본 후 쓴 것으로, 관람 후에 읽을 것을 추천드립니다.



자, 이번 곡은
도시에서 한 번이라도 외톨이가 되어본 사람들에게 바치는 곡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한 편에 20분을 크게 넘지 않는 시트콤이나 짧고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에 비해 훨씬 길고 또 느린 템포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가끔 이렇게 안락의자에 파묻혀 누군가의 길고 잔잔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기분이 들면 <비긴 어게인>을 다시 꺼내본다. 반복적인 것을 꺼려하는 내가 몇 번이고 돌려 보는 영화는 <비긴 어게인>이 유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소개하는 일은 없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는 동안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기분들과 냄새를, '인생 영화'라는 흔하고 가벼운 표현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그레타는 물론이고 영화의 인물들은 당연히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지만, 내게는 신기하리만치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반복되고 지겨운 것이라면 무조건 피할 방법만 찾아왔던 나에게 이 영화는 그래서 특별하다. 너무 많이 봐서 대사와 표정까지 외워버린 장면들은 지겨움이 아닌 편안함을 주고, 데이브의 공연장을 뛰쳐나와 자전거를 타고 뉴욕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그레타의 눈빛은 매번 내게 점점 더 깊어지는 울림을 준다. 자신이 만들고 또 그래서 정답을 정확히 안다고 생각했던 음악이 다른 사람을 통해 더 크게 공명하는 선율이 될 수 있었음을 깨달은 사람의 눈빛. 그래서 이 장면은 유난히 내 가슴에 짙게 자욱을 남긴다.


  모든 인물들의 선택이 모두에게 최선의 선택임을 알아차리는 것. 그 모든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또 인정하는 것. 순진하다고 비웃음 당할지라도 또렷한 눈으로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ost 좋은 영화'라는 가벼운 단어의 조합에 그 모든 메시지들이 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고작 세 단어로는 요약될 수 없는, 불안한 동시에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그레타를 앞으로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했다고 확신하던 삶에서 방황하던 열정을 기어코 길어 올린 댄과, 그 모든 순간에 그들의 곁에서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내던 그레타의 대학 친구 스티브를. 순진해서 용감한 게 아니라, 순진하기 위해서 용감했던 그들을 또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어지는 걸 어찌할 방법은 없을 것이므로.


  이 글의 맨 위에 놓여있는 문장, "자, 이번 곡은 도시에서 한 번이라도 외톨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는 그레타가 망설이다가 노래를 시작하기 직전에 하는 대사이다. 도시에서 한 번이라도 외톨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그 말은 곧 이 영화에 담긴 일상의 진주 같은 그 노래들이 당신과 나, 우리를 위한 노래라는 의미일 것이다. 도시에서 외톨이가 되는 경험쯤은 우리에게 익숙함을 넘어 일상에 가까우니까. 그리고 그 슬픔을 끌어안는 방법을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적당한 간식거리와 따뜻한 담요를 꺼내어 편하게 앉아, 어쩌면 이미 봤을 이 영화를, 이번에는 '직접' 목격해 보시기를.


  아, 가장 중요한 준비가 한 가지 더 남았다. 외로운 사람들이 외로움과 함께 춤추는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고 또 기꺼이 그 일부가 될 각오를 마련하기를, 나는 당신과 멀리 떨어진 도시 어딘가에서 역시 외롭게 바라고 있겠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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