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주말 재취업을 한 뒤 처음으로 북스테이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한 시간 떨어진 춘천으로였다. 금요일에 퇴근하자마자 출발했더니 그날 저녁 늦지 않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춘천의 지역 콘텐츠와 굿즈를 개발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춘천일기'에서 운영하는 '일기스테이'란 곳을 예약했다. 대부분 서점 한편에 딸린 방 하나를 내주는 것과 달리 이곳은 오래된 여관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덕분에 규모도 크고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 독립적이었다. 책을 읽으러 떠났다가도 하루 종일 방 안에 있으면 이상해 보일까 봐 억지로 나와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서점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자리를 피하곤 했던 것과 달리 토요일에는 오후 늦게까지 방 안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숙소 이름과 잘 어울리게도 나는 일기장 두 권과 함께였다. 하나는 2019년에 쓰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20년부터 쓰려고 새로 장만한 것이다. 새 일기장은 조금 특이하게도 5년 동안 쓸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날짜마다 연도를 기입하는 5개의 칸이 있어 나중에 돌아보면 같은 날짜, 같은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연도의 10의 자리가 바뀌는 것과 재취업을 기념해 구입했다.
지난 화에서 말한 대로 나는 다시 직장에 돌아가면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다 젊은 시절을 다 보낼 것 같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아니라 먼 외국이어야지만 새롭고 재미난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반복되는 일상은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일까?
사실 나는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 어디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면서 공부를 대신했고, 그러다 만난 독일 베를린에 반해서 유학을 했다. 현지인 남자친구가 생겨 학교를 마친 뒤에도 그를 보기 위해서 몇 년 간 한국과 독일을 왔다 갔다 했다.
젊을 때 해외 체험을 잠시 하는 것과 그곳에 평생 정착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였다. 나의 진로와 남자친구와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학위도, 한군데 정착해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떠돌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글을 어떻게 선보일지나 그걸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때쯤 뭔가를 이뤘겠거니 하고 어릴 적 막연히 생각했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꼼짝없이 취업을 해야 했다. 한국에 통용되는 학위를 얻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운이 좋게도 전공을 살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일 년 여 동안 바쁘게 일하고 계약이 종료되어 쉬게 되었을 때, 나는 마냥 기쁠 줄 알았다. 제도 안으로 돌아온 지 수 년 만에 드디어 내 시간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후에 예정된 같은 회사의 정규직 채용에 응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진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퇴를 하고 혼자 공부했던 만큼 자기 관리에도 자신 있었다. 실제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거의 못 쓰고 있던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가하며 관심 영역을 넓혔다. 그를 통해 만난 출판기획자의 의뢰로 책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북스테이를 다니면서 유튜브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플랫폼에 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문학계에 내 목소리를 내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공중에 붕 떠 있다가 땅에 발을 내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독일에도 전 남자친구를 비롯해 친구들이 몇 있었고, 그들과 함께 멋진 곳들을 다니며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언어도, 자란 문화 배경도 달랐기에 그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객 또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내가 주체적으로 재밌고 의미있는 일을 벌이고 싶었다.
지역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는 '춘천일기' 와 그들이 처음 펴낸 책 『우린 춘천으로 가기로 했다』의 저자 백동현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백동현은 춘천에서 '수아마노'라는 이탈리안 식당을 운영하는 셰프다. 이탈리아 요리에 빠지게 된 계기와 유학 시절, 그리고 춘천에 식당을 열게 된 과정을 책으로 묶었다. 내가 숙소를 예약한 날 마침, 책에 나오는 음식을 맛보며 저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북토크가 열린다기에 참가했다.
비이탈리아인으로서 이탈리아 음식을 이해하기 위해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과 실습을 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 높은 생활비와 열악한 식당 환경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공감이 갔다. 그러다 자신의 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을 열기 위해 춘천으로 왔다. 백동현 셰프는 지역이 달라졌으니, 재료가 그 지역의 땅과 물과 햇빛으로 자란 것들로 달라졌을 테고, 그렇다면 그 재료를 표현하는 레시피도 달라져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적인 맛을 담아 해물전의 바삭함을 이탈리아 식으로 표현한 해물 크로스티니를 시작으로, 강원도를 대표하는 감자를 주재료로 하는 만큼 더 제대로인 뇨끼, 이탈리아인들의 소울푸드라는 가지 라자냐, 우리나라 사골처럼 오래 끓여내는 라구 볼로네제가 식탁에 펼쳐졌다. 요리가 만들어진 과정을 듣고 먹으니 맛이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었다. 지역을 연구하고 담아내려는 노력이 정말 대단했다.
책을 내고 북토크 행사를 개최한 '춘천일기'는 참가자에게 자신들이 제작한 2020년 탁상 달력을 선물했다. 앙증맞은 크기에 원고지 모양이 기발했다. 직장에 가져와 책상에 세워놓고 보니 표지에 들어간 "살듯 여행하기, 여행하듯 살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춘천일기'의 모토이기도 한 건지 숙소 곳곳에 붙여져 있던 문구다.
그렇다. 무조건 멀리 떠나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을 계속해서 돌아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이라도,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쉬면서 독립적으로 일을 해보려고 했을 때는 내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앞으로 직장에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쌓아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키워나갈 것이다.
5년 뒤에 일기장을 되돌아보면 성장해 있을 것을 생각하니, 페이지를 채울 앞으로의 일상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