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북스테이] 완벽한 날들, 속초 /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by 예주연

북스테이를 처음 시작한 이유는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조각난 삶을 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머물며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계속 기숙사에만 살다가 독립할 생각에 들떠 꼼꼼히 살피지 않고 덜컥 계약한 집에 끝끝내 정을 붙이지 못한 채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취업을 하면서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곳을 알아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직장이 위치한 동네는 컨벤션 센터와 무역 센터가 들어선 업무 지구라 고급 아파트 외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사무실을 개조한 원룸이 내 예산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딱 그 가격만큼 좋았고, 나빴다.


출근 30분 전에 일어나도 지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큰 장점이었다. 덕분에 퇴근하고 난 뒤에도 다음날 걱정을 하지 않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고, 조금만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면 아침에 한 시간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거나 업무와 관련 없는 글을 쓰는 여유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내부 설비나 건물 관리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남들이 통근으로 쓰는 하루 2시간을 벌었지만, 그 2시간을 보낼 만큼 집이 아늑하지 않았기에 밖에서 버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은 짐을 부려놓고 잠만 자는 곳이 되어버렸다. 나는 퇴근을 하고도 집에 가기 싫어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다거나 모임에 나가곤 했다. 주말에도 삭막한 동네를 떠나고 싶어서 약속을 만들고 여러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빼곡히 채워진 일정표를 보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속 없이 사람들과 행사들을 쫓아다니느라 진짜 해야 할 일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해 일을 쉬면서 자유 시간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직장인 시절 로망대로 낮 시간에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에서 햇살을 받으며 노트북을 열어놓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면 글이 저절로 써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노트북과 참고할만한 책을 한두 권 챙기면 짐이 한가득이었다. 카페에 짐을 풀고, 좌석이나 주변 소음에 적응을 하고, 작업에 들어가려 시동을 걸면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리를 옮겼다. 부른 배에 커피와 차를 꾸역꾸역 부어 넣으며 또다시 몇 시간을 확보했지만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내 삶은 상업 공간에서 음료 한잔을 시키고 눈치 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 2-3시간으로 조각나 있었다.


그 시간은 여기저기 흩어진 아이디어를 모아 새로운 글로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어린 시절 편안한 내 방 내 책상에서 빈 종이를 두고 밤새 아무 제약 없는 꿈을 펼치던 때가 그리웠다.


그때 북스테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서점 중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을 제공하는 곳이 몇 있다는 것이었다. 책과 함께하는 하룻밤이라니. 빅토리아 여왕이 관료들에게 3년에 한 번씩 한 달 동안 휴가를 주면서 셰익스피어를 읽게 한 셰익스피어 베케이션(Shakespeare Vacation)이나, 세종대왕이 젊은 학자들에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마련한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에게 시간은 있었으니 그런 휴가를 즐길 공간만 있으면 되었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밤새 책을 쌓아놓고 읽고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대었다.



처음으로 묵은 북스테이 공간은 속초의 '완벽한 날들'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 바로 뒤에 위치해 편리하게 갈 수 있는 데다 근처에 '동아서점', '문우당' 등 지역 서점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해서 궁금해 택했다.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해 1층은 서점으로, 2층은 숙소로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묵은 1인실은 아쉽게도 방이 좁고 책상이 없어 작업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공용으로 쓰는 거실과 1층 서점에 나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고, 어쩌면 빈 종이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어린 시절, 검열 없이 몽상을 펼치던 때와 달리 지금은 내 한계가 드러날까 봐, 완성하지 못할까 봐 완벽한 환경을 가지지 못한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북스테이 공간이 그 이름을 따온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읽었다. 2019년 타계한 미국 시인의 산문집이다. 작가는 프로빈스타운이라는 작은 예술가 마을에서 자연을 찬양하는 글을 남긴 걸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랄프 왈도 에머슨과 너대니얼 호손 등 초월주의 작가들처럼 직관을 중시한다. 메리 올리버는 그러나, 세상과 조응하는 "완벽한" 순간을 위해서 흔히 생각하듯 웅장한 자연이나 특별한 기후가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한다. 평범한 날들 가운데, 늘 지나다니던 길 가운데서도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조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완벽한 날들"이다.



몇 해 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행복의 바다에 익사하는 것이라기보단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행복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행복이 거저 주어졌다. 시간이 사라진 듯했다. 긴급함도 사라졌다. 나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 간의 중요한 차이도 다 사라졌다. 나는 나 자신이 세상에 속해 있음을 알았고 전체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렇다고 세상의 수수께끼를 푼 기분을 느낀 건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혼란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62p.


책에는 저자가 프로빈스타운의 바다와 숲을 거닐며 만난 물고기, 새, 나무 이름 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나열되어 있다. 자신의 주변을 애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느끼는 이에게는 당연한 글쓰기 방법일지 모른다. 프로빈스타운에 가본 적은 없지만 속초의 바닷가와 영랑호, 그 호수를 둘러싼 숲을 거닐면서 읽고 있어서인지 도시에서 읽을 때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2박 3일 동안 내가 다니며 본 것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영감이나 완벽한 환경을 기다리지 않고, 연필이 가는 대로.


세상에 시작하고 전진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연필은 없어. 우선 많이 쓰는 게 최선이야.
- 메리 올리버, 「가자미, 일곱」, 『완벽한 날들』 125p.


그 순간에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와 연필, 종이가 함께 하는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완벽한 날들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SJQv188-1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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