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없는 북스테이
[북스테이] 변산바람꽃, 부안 / 글쓰기
'스테이 변산바람꽃'은 몇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다. 다녀온 지인이 강추를 해서 사진을 찾아보았다가 갯벌을 내려다보는 넓은 창, 별을 볼 수 있는 다락, 나무가 주는 아날로그적인 느낌, 그리고 욕조와 함께 천천히 흐를 시간에 대한 암시에 반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미뤄왔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남자친구가 생겼다가도 둘이 시간과 마음을 채 맞추기도 전에 이별을 맞곤 했다.
어릴 적에는 용감하게 혼자 세계를 누볐으면서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됐을까. 몇 달간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충동적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변산반도로 향했다. 그동안 1인실이 새로 생겼다는 것도 여행을 결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름하여 '시인의 방'ㅡ변산반도를 사랑하는 안도현 시인이 종종 와 머물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3시간 정도 시외버스를 타고 부안에 내려 마을버스를 1시간가량 더 타고 들어가 숙소에 도착했다. 반도라는 데서 알 수 있듯 바다로 툭 튀어나온 외진 곳이었다. 주변 도보 거리에는 상점 하나 없었다. 대신 숙소는 넓은 부지에 나무집 몇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화를 하자 호스트가 나와 그중 한 건물의 1층으로 안내해주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서였을까. 호스트는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얼른 자리를 떴다. 리셉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식 시간 외에는 공용 공간인 식당에 가보아도 호스트나 다른 숙박객을 만나기 어려웠다. 갑자기 막막한 느낌이었다. 창가에는 사진에서 봤던 더블침대와 나무 욕조 대신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 좁은 싱글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딱 한 명만을 위한 방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쓸쓸함을 달래 보려 책상 위 방명록을 들척였다. 1인실이라 그런지 혼자 생각을 정리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랑과 인연,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들... 언젠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만날 거라는 기대로 삶을 견뎌왔다. 하지만 이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하긴 했지만, 이것도 자주 있었던 다툼 중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인생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용기를 주기도 했다. 그와 헤어졌다는 걸, 아니 헤어져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맞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외로움에 같이 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와 얘기하거나 데이트 계획을 세울 때에는 진짜 고민들이 한걸음 물러나는 느낌이었으니까. 고민들은 대면하지 않았을 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찜찜함이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어 그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꼬투리 잡아 싸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에게 문자를 보낼 시간에 네가 그토록 쓰고 싶다던, 진짜 글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나를 비꼬았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몇 년 전부터 쓰다가 막힌 소설을 가지고 갔다. 내 글을 다 쓰기 전까지는 다른 책으로 도망가지 않으리라. 딴짓도 하지 않으리라. 어차피 차 없이는 갈 수 있는 곳도 없고 침대와 책상으로 이뤄진 단출한 방 안에는 주의를 돌릴 만한 것도 없었다. 물이 빠졌다 들어왔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갯벌이 가장 큰 방해물일 정도였다. 책 없는 북스테이인 셈이었다.
진도가 더뎌서 그런 걸까. 글을 쓰고 있으면 그동안 세상이 나만 놔두고 전진하는 것 같아 초조해진다. 몇 년째 쓰고 있던 소설은 이번에 헤어진 남자친구(이하 편의상 B) 전에 만나던 친구(이하 A)를 이해하고 싶어 시작한 소설이었다. A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비밀도 많고 자주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 그전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타인과의 거리를 존중했던 것과 달리, A와는 며칠만 연락이 안 되어도 속이 탔다. 언제 다시 나타날지, 이러다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곁을 지키느라 나는 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잊었다.
숙소에 머문 지 이틀 째, 글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으면서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기 어려워 길을 나섰다. 숙소 근처에서 반도를 반 바퀴 정도 도는 도보길, 여기 말로 하면 마실길의 한 구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3시간 정도 걸어 모항에 도착했다.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었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하략)
- 안도현, 「모항 가는 길」
석양까지 감상하고 이제 숙소로 가려니 깜깜해져 숲길인 마실길로 돌아갈 순 없었다. 시와 영화의 배경이 된 큰 항구인 만큼 돌아오는 교통편이 있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걸어온 게 실수였다. 버스도 없고, 근처 호텔에 가서 얻은 콜택시 번호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무작정 숙소 방향으로 차도를 걷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차를 세우려 시도해보았다. 몇 대가 무시하고 지나가기를 한참, 한 대가 멈춰 섰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사정을 설명하니 친절한 부부가 숙소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찔한 경험이었지만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마실길은 차도보다 바다와 가까운 숲길이었다. 그나마도 중간에 길이 끊겨 해변으로 내려갔다 바위를 타고 언덕을 올라야 하기도 했다. 이때 길을 잃거나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구조가 필요할 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릴 수 있게 일정 간격마다 국가지점번호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표지판을 보고 쓰고 있던 소설에서 막힌 부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 부분이 풀리자 소설이 금세 완성되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 A와의 관계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A를 이해하고 싶어 쓴 소설이지만 A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쓸 데 없는 집착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소설의 내용을 더 밝힐 수 없어 추상적으로 말해야 하는 게 아쉽다. 언젠가 발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 여행을 떠나게 만든 B와의 관계도 정리가 되었다.
A와 만나던 동안 여름 방학을 맞아 그가 있는 서울을 떠나 부모님 집에 일주일 정도 가서 그 당시 구상하고 있던 장편소설의 한 페이지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이 속도라면 소설을 완성시키는 데 수십 년이 걸리겠다 싶어 초조하기도 했지만, 한 페이지만큼의 내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데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그와 비슷한 감정을 아주 오랜만에 맛보았다.
도시의 속도에 뒤처지는 것만 같아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좇았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에 집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공허해질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가끔은 물때를 기다리는 것도 필요한 법. 도시에서 물러나 원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하며 나를 채웠다. 이 훈련을 위해 앞으로 계속 북스테이를 떠날 생각이다. 그 여정 끝에는 도시에서도 내 속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 스테이 변산바람꽃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