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맞는 이를 찾아서

[북스테이] 취다선, 제주도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by 예주연

작년 여름 제주도에서 특이한 숙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차와 명상에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취다선'이란 곳이다. 이름 그대로 명상과 다도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리조트로, 1인 여행자에게는 매달 바뀌는 그달의 책을 웰컴북으로 제공한다. 내가 머문 2019년 7월의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였다.



리셉션에서 책과 함께 체크인을 마치고 배정받은 방의 문을 여는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멀리 우도를 품은 바다를 바라보는 넓은 창이 나있고 그 곁에는 창만큼이나 넓은 하얀 침구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 풍덩 몸을 던지고 하루 종일 뭉그적거려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이 쾌적한 곳이었다.



방 안에도 차를 내려 마실 수 있게 다기가 준비되어 있어 있었다. 다기 테이블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침대 맡으로 가지고 와 때로는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으며, 때로는 테이블을 책상 삼아 글을 쓰면서 차를 우려 마셨다.


방 안에서만 즐기기도 충분해서 지하 1층에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다실에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안 내려갔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약을 하면 일행 별로(내 경우에는 나 혼자) 독립된 방으로 안내해 차 우려내는 법과 즐기는 법을 알려준다.


물을 끓여서 다구를 데운다. 숙우(물의 온도를 식히는 그릇)에 옮겨 담아 홍차 90도, 녹차 80도 정도가 될 때까지 식혀준다. 그리고 찻잎에 부어 3~4분 우려 준다. 다관(차를 우리는 주전자)에 물을 오래 두면 차가 떫어질 수 있으니 우려낸 후에는 숙우에 다시 옮긴다. 그리고 찻잔에 따라 차의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세 모금에 나눠 마신다.


한 명밖에 없는데도 정성스레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집중하고 있으니 차를 우려내는 동안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전혀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시연을 해주었던 선생님이 자리를 비켜주시고 남은 시간은 나 혼자 배운 대로 해보았다. 늘 마시는 차지만 이렇게 제대로 갖춰 마시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다실이 예쁜 것도 차를 즐기는 데 한몫을 했다. 바다를 향한 위층의 방들과 달리 지하의 창은 반대쪽 개발되지 않은 들판 쪽으로 나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명상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다실에서는 각 방마다 작은 창으로 가꾸어놓은 정원을 볼 수 있다면, 명상 공간은 넓은 홀의 한 벽면이 모두 창이라 자연 그대로를 끌어오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요가를 하는 건 동남아나 남미에서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정적 명상, 동적 명상 두 가지 프로그램 중 동적 명상을 택해 참여했다.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후 발을 내디뎠다. 발바닥, 발목, 무릎, 골반, 척추, 어깨 등 평소에는 의식조차 못하던 몸의 부분부분을 의식하면서 걷고, 때론 멈추어 호흡을 느껴보았다. 명상이라 그래서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집중할까, 지레 겁먹은 게 우스울 정도로 50분이 금방 지나갔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무더위를 피해 도쿄에서 아마사산 기슭 별장으로 사무실을 옮겨 여름을 나는 건축설계사무소에 대한 내용이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눈으로 노건축가의 철학과 자연 풍광이 펼쳐진다. 도면을 그릴 연필을 깎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텃밭에서 재배한 음식으로 당번이 돌아가며 요리를 하고, 식사와 티타임에 모두 둘러앉아 그날 있었던 얘기를 나누고, 차례차례 목욕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반(半)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이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나도 도시의 여름을 피해 온 제주도에서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대로 명상을 하고 절차를 갖추어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생활을 하고 있으려니 더 실감이 났다.


사실 나는 지극히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과도 한 공간에 오래 같이 있는 걸 불편해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부터 시작해 단체 생활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왔다. 히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단 생활의 부조리함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오랫동안 소속이 없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지금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집순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집에 붙어있는 일 없이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을 하고 여행을 다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할 때는 한 달 이상 집 밖으로 발 한번 안 내디딘 적이 많았고, 그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와 바깥세상의 통로가 되어 주었고, 재정이나 행정부터 삼시세끼 먹을 것까지 모든 걸 해결해준 덕분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 와 혼자 생활하면서 생존을 위해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 섞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한 번씩 무너질 때마다 원래 내 성향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때 사회에서 물리적인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곳이 바로 집일 것이다.


책에서는 집을 짓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마도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 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 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와 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 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337p.


내향적이고 집순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여행을 열심히 다니는 것도 내 내면 밖에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아닐까. 사춘기 시절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큼 나와 마음 맞는 사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를 단단히 하고 나만의 공간을 짓기 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서 이렇게 떠도는 것일 테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책을 읽는 것은 낯선 사람과의 관계와 비슷했다. 머문 숙소에서 이달의 책으로 받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베스트셀러였다는데 나는 그전까지 들어본 적 없었고 아마 스스로의 선택으로라면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몰랐던 책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은 물론 숙소에서 이 책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하면서 독서와 투숙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계절에 따라 "여름"이 들어간 책을 무작정 골랐을 수도 있겠지만 차를 홀짝이며 소설 속 인물들이 티타임에 나누는 대화를 읽는다거나, 나에게 집중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다와 들판을 내다보며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한다거나, 방 안에서 혼자 있다가 지하로 내려가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책과 숙소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의 2019년 여름의 기억은 오래 그곳에 남아있을 것 같다.


*취다선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NLpsDNPCX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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