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앞에서 기괴한 바위의 형태를 흉내 내는 나의 세 살 무렵을 담은 사진이 있긴 하지만 기억은 전혀 나지 않고, 이십 대 초반 부모님과 다시 함께 간 적이 있지만 쉬고 싶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호텔이 있는 중문단지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니 거의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 많이 망설였다. 큰 섬을 돌아보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될 것 같아 길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느라 이제껏 못 간 것이었으면서도 이번에는 혼자서, 그것도 차도 없이 다닐 자신이 없었다. 웬만한 맛집은 두 명 이상이어야지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테고, 버스를 타고 다니자면 접근이 불가한 곳을 포함 배차 시간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었다.
고민 끝에 다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다시는 안 갈 사람처럼 이번 한 번의 여행으로 제주도의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하고 오려니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욕심을 버리자 편안해졌고, 여행은 원래 바라던대로 휴식과 일상에서의 일탈이 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휴대폰으로 그때그때 길찾기를 할 수 있고, 정류장에 가면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이 전광판에 표시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나는 한번 갔던 곳은 다시 안 가는 경향이 있다. 유명하고 인기 많은 곳을 찾는 걸 즐기지만 꼼꼼히 살펴본 리뷰와 사진으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막상 가면 김이 새기 일쑤였다. 까다로운 입맛이나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니라 여기 아니면 안 돼, 하는 단골이 생기지도 않았다. 미션을 클리어하듯 유명한 곳을 방문한 뒤 바로 잊고는 새롭게 뜨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혼자 서울에서 오래 생활을 하면서 동네에 늘 지나다니는 길이나 간단한 끼니를 때우려 자주 들르는 밥집이 생겼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다가 계절의 변화로 라일락향으로 숨이 막히는 봄이 된다거나 아스팔트를 뚫는 흙내음을 선사하는 비를 맞는 여름이 되면, 그 길을 함께 지났던 사람과 추억 한 조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옛 연인과 함께 갔던 특정 동네에 다시 가게 되면 세븐**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나와 올**영까지 걸었다가 던**너츠에서 좌회전을 했었지, 하는 식으로 그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삭막한 도시를 상징하는 어디에나 있는 똑같은 간판의 체인점들이 하나하나 다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제주도에 있는 일주일 중 이틀 동안 비가 왔다. 새로운 숙소 '독채민박 초'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뒷 정원에 비가 토독토독 떨어지고 있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 그 소리를 들으며 그날 산 『여름 밤, 비 냄새』를 마저 읽었다.
전날 묵었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새로운 숙소 '독채민박 초'로 옮기는 길에 가수 요조가 운영하는 '무사책방'이 있어서 들렀다. 아무래도 여름에 여행을 하고 있다 보니 『여름 밤, 비 냄새』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와 골라 집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우울증 수기집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을 엮은 김현경 작가의 책이었다. 이 책도 '무사책방'이 제주도로 옮겨오기 전 서울 계동에 있을 때 그곳에서 구입했는데, 같은 작가의 작품을 같은 책방에서 만나게 되어 신기했다.
배낭에 더해 메고 다니던 보조가방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라 버스를 기다리며 틈틈이 읽었더니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두 번의 여름을 함께 난 한 사람에 대한 내밀한 마음을 담고 있어 한 번에 훅 읽어버리기보단 이렇게 조금씩 아껴 읽고 비슷한 내 경험과 당시의 감각을 소환해보기에 좋았다.
여름, 밤, 비, 짝사랑에 대한 여러 노래 가사와 책 구절이 모아져 있기도 하다.
'독채민박 초'는 말 그대로 독채 2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약을 하면 현관 비밀번호를 가르쳐줘서 호스트와 마주칠 필요 없이 체크인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근처에 살고 있는 호스트가 세심한 배려로 미리 모든 걸 준비해놓아 편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숙소의 가장 특별한 점은 부엌과 침실 외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숙소가 총 2채이니 다른 한 채에도 이만한 양의 책이 있다는 것일 텐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찬찬히 살피며 얼굴 본 적 없는 호스트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4인이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스탠드 의자로 앉을 수 있는 바 공간이 있어 북카페 하나를 통째로 독차지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커튼으로 가릴 수 있는 비밀공간이 창쪽으로 하나 더 나 있었다. 하루 종일 숨어서 책을 쌓아놓고 읽고 싶은 곳이었다.
여로를 씻어내고 따듯한 차 한잔을 우려 그 자리에 반쯤 누워 책에 등장하는 음악을 재생했다. 빗소리와 섞여 드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정말 완벽한 여름밤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여름밤, 하면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책에서 화자는 여름밤에 비가 오기만 하면, 비 오는 여름밤에 자주 만났던 짝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린다.
여름 밤과 비 냄새에 그의 이름이 적힌 라벨을 붙였다. - 김현경, 『여름 밤, 비 냄새』 15p.
그런 그녀에게 지인은 "어떤 사람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 때문에 어느 사물이나 단어, 개념에 그 사람의 이름이 붙는 거라"는 라벨론을 펼친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체인점의 간판이 아련하고 아픈 느낌을 주는 걸 경험한 나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에도 비가 왔지만 또 다른 숙소를 예약해놓았기에 길을 나서야 했다. 5박 6일 동안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각기 다른 동네의 숙소에서 하룻밤씩을 머물렀다. 이번이 (거의) 처음이니깐 제주도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마쳤을 때는, 처음 계획했을 때와 달리 한 번 가봤으니 된 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가야 할 곳이 더 많아졌다. 다니다 마주친 사람들의 소개로 새로 알게 된 곳도 있고, 마음을 비워 이번에 못 간 곳도 있지만, 그보다 이번에 내가 갔던 곳들 하나하나가 다 좋아 모두 재방문하고 싶어진 것이다.
철저한 계획 아래 유명한 곳을 찍는다기보다는 자연스레 움직이다 마음이 끌리는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하는 등 여행 방식을 조금 바꿔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의미 없던 일상에 색깔을 불어넣는 (짝)사랑과 비슷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