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닮은 사람

[북스테이] 오! 사랑, 제주도 / 『해녀들의 섬』 리사 시

by 예주연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고 숙소를 계속 옮겨 다녔다. 곳곳에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루는 아무 일정을 잡지 않고 비워두었다. 오늘 갈 숙소 바로 옆에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협재, 금능 해변이 있어 관광을 잠시 쉬고 해수욕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 그 전날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전날 머문 숙소에서 오늘 밤 머물 숙소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대신 가볼만한 곳이 있지 않을까, 지도를 보다가 강정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 해군기지 관련 뉴스로 접했던 곳이다.


치열했던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는 결국 세워졌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는 입지 선정에서부터 공사까지 주민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한 정부를 규탄하는 플랜카드가 쓸쓸히 휘날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씨 때문인지, 날을 잘못 맞춰온 건지 평화센터는 문이 닫혀있었고 마을은 인적이 드물었다.



바다까지 걸어가 유일하게 문을 연 횟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근처에 있는 사람을 매칭 해주는 앱에서 알람이 떴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살다가 재방문 했다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친구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 혼자 시간을 때워야 한다며, 친구의 차로 나를 픽업해 다음 숙소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비를 뚫고 다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그러자고 했다. 주문한 음식을 다 먹기가 무섭게 도착한 그는 나를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렸다. 중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바닷가에 멈춰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렇게 호감을 발전시켰다는 해피엔딩이면 좋으련만, 목적지에 도착하자 빨리 보내고픈 마음뿐이었다. 섬의 이쪽에 오기가 너무 어렵다며 빨리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 하고, 바다 바로 옆에 즐길거리가 하나도 없어 술과 음악을 제공하는 바를 열고 싶었는데 규제에 막혔다고, 제주도가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기에 한참 뒤떨어졌다고 불평하는 개발론자인 외국인에게 내가 강정마을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화는 계속 엇나갔다. 그래도 예의상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고 바닷가를 산책했다. 다음을 바라는 그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보내고 나자 드디어 낯선 사람과 억지로 맞추어 가는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해가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일주일 동안의 제주도 여행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근처에 돌탑이 있기에 나도 소원을 빌며 돌을 얹었다.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 했으면서도 나의 소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였다. 그리고 짐을 미리 풀어놓은 숙소의 이름은 '오! 사랑'.



'오! 사랑'은 북스테이를 "서점에서의 하룻밤"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가장 일치하는 공간이 아닐까 한다. 옛 가정집을 개조한 서점 '아베끄' 구석에 비밀스러운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면 바로 침대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운영 시간이 지난 밤 손님 없이 텅 빈 서점을 구경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어로 "~와 함께"라는 뜻이라는 '아베끄(Avec)'는 사랑에 대한 책을 주로 취급한다. 그래서 북스테이 공간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일 테다.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고 서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게 북돋아주고 하루하루가 감탄스러워 절로 오! 사랑이란 말이 나오게 할 인연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꼭 이성 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우정도 크게 보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 사랑' 책꽂이에서 발견한 리사 시(Lisa See)의 『해녀들의 섬(The Island of Sea Women)』에서는 두 친구의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가 제주도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No one picks a friend for us; we come together by choice. We are not tied together through ceremony or the responsibility to create a son; we tie ourselves together through moments.
- 리사 시(Lisa See),『해녀들의 섬(The Island of Sea Women)』 36p.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가 우연히 해녀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흥미를 가지고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한다. 외국인임에도 자료 조사를 철저히 했는지 해녀를 비롯한 제주도의 고유한 문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게 담겼다.


책 초반에는 설문대와 김만덕 등 신화 안팎의 강인한 여성들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제주도가 이상향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모계 사회는 남성의 어업을 제한한 조선 본토의 차별 정책에 기인했을 뿐, 여자들은 여전히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유교 문화와 가부장제에 속박되어 있다. 주인공 영숙과 미자는 일제시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해녀다. 어릴 적부터 친자매처럼 자란 이들은 그러나, 결혼을 하면서 각자 남편의 거주지 따라 떨어게 된다. 그리고 남편의 이데올로기, 경제 상황 등에 따라 점점 더 멀어지고 비밀과 오해가 쌓인다.


그 중심에 동족 상간의 4.3 사건이 있다. 4.3 사건은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소련 신탁으로 넘어가는 사이 우리나라가 자주권을 갖지 못하고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어난 비극 테다. 설은 그때 완전히 사이가 벌어졌던 두 친구가 세월이 흐른 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끝이 난다. (이렇게 쉽게 요약될 수 없는 사건 과정과 감정 변화가 소설의 진미이니깐 꼭 읽어보길 권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저지른 행동 뒤에 뭔가 더 큰 이유나 반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싱거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5.18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과 달리 4.3은 아직 사건이라 불린다. 어디선가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이웃이고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제주도 주민들은 진실 규명을 철저히 하기보다 그냥 용서하고 잊고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런 점에서 4.3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숙소에 오는 길 다녀온 강정과 연결해 더욱 진행형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다는 모든 걸 품고 계속 파도친다. 소설은 광활한 바다의 알 수 없음과 함께 어머니와 같은 포용력을 아름답게 그린다. 그런 바다를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오! 사랑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EGJ-uENn2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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