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아닌 여행

[북스테이] 수상한 소금밭, 제주도 / 「폭풍우」 르 클레지오

by 예주연

지난 화에서 다룬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에 이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다른 외국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J. M. G. 르 클레지오의 「폭풍우」다. 정확히는 우도를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이 제주도, 제주도 해도 이제까지 와볼 기회가 없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육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열대 식물과 자연경관 등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동남아 휴양지에 와있는 듯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말도 통하고 음식도 잘 맞다니! 최고의 여행지를 이제야 찾은 것을 아쉬워하며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중 정점을 찍은 곳이 우도였다.



첫날 공항에 내려 제주 시내를 구경하고 첫 숙소인 '수상한 소금밭'에 짐을 풀었다. 게스트하우스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나 의아해했는데 말 그대로 소금밭 한가운데 숙소가 수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근처 '소심한 책방'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여기 한번 머문 사람들은 여기만 다시 찾는다고 할 정도로 마니아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과연 오늘 만난 사람과도 비밀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노란 전구를 밝힌 운치 있는 마당에서부터 맛있는 간식과 제주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식당 겸 라운지 공간까지 게스트하우스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나도 이곳에서 중요한 여행 정보를 얻었다. 둘째 날 일정은 제주도 동쪽에 위치한 부속섬 우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잡놓았다. 숙소가 위치한 종달리에서 7km 정도 떨어진 성산항까지 가야 우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숙소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 종달항에서도 하루에 서너 번 배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식을 먹으며 둘러보던 식당 벽에서 발견한 시간표에 따르면 다음 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서둘러 짐을 싸서 맡기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혹시나 배를 놓칠세라 마음은 급한데, 길은 얼마나 굽이지고 아름다운지. 짝을 지어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아 계속 머물고 싶었다. 밭과 논을 가로지르는 돌담길을 따라 걷자 바다가 나왔다. 그리고 막 도착하는 배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우도에는 섬을 한 바퀴 도는 버스가 있다. 그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내려 30분 정도 구경을 하고 다음 버스를 타면 이른바 유명한 관광지들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제주도에서 당일치기로 오기 때문에 개발된 것일 테다. 이 조그마한 섬 안에 검은 모래로 뒤덮인 검멀레 해변이 있는가 하면, 홍조단괴로 이루어진 덕에 새하얀 모래에 에메랄드 빛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서빈백사도 있었다. 제주 최초의 등대가 있는 우도봉에도 오르고, 섬 속의 섬이라는 비양도에도 갔다. 우도의 명물 땅콩 아이스크림도 맛보고 말타기 체험도 해보는 등 야무지게 하루 코스를 "클리어" 했다.



그랬기에 소설 속에서 외국인 화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보고 찔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도에 가야 할 곳을 표시해놓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녀온 곳을 표시하는 그런 빌어먹을 관광객이 아니다. 첫 키스를 했던 벤치, 완료, 땅끝 등대, 완료. 고독한 산책길, 약속의 정원, 난파선, 완료, 완료, 완료. 그러고 나서 머리가 텅 비고 돈을 다 쓰고 나면 그곳을 떠나는 관광객 말이다. 나에게 섬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다. 지나갈 수 없는 곳, 그 너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곳. 망망대해, 그것은 망각이다.
- 르 클레지오, 「폭풍우」 74-5pp.


화자인 필립 키요는 베트남에서 종군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한국계 입양아 메리 송을 만나 함께 우도로 오지만 그녀는 바다로 사라진다. 그렇게 여자를 잃고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우도에서 미군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혼혈아 준과 만난다. 소설은 필립 키요와 준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펼쳐진다.


관광객은 여행자와 비교되어, 수동적으로 정해진 루트만 따른다고 멸시받곤 한다. 그런 점에서 관광객은 행동하는 자와 대비되는 방관자와 비슷하다. 그리고 필립 키요가 관광객을 그렇게 혐오하는 것은 자신에게 끔찍한 범죄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용기 있게 나서지 못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 중 미군 3명이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걸 보면서도 막거나 신고하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정에 선 그에게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그는 저들과 공모하여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피해자도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아무 죄 없는 이 불쌍한 여인이 그를 향해 눈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구해달라고 애원할 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 여러분, 그는 진술을 거부합니다.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기 위해, 책임을 느끼지 않기 위해, 진실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킵니다.
- 94-5pp.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얼마나 많은 순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가. 어릴 적에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며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어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진정한 여행은 돌아옴을 계획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떠나온 곳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여기, 사람들에 스며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한 일정과 다음 일정 사이에 비는 시간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 다음 일정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피부가 타거나 다치지 않도록 몸을 사린다. 떠나온 곳이자 곧 돌아갈 곳, 그래서 나에게 유일한 현실인 곳의 사람들을 의식해 끊임없이 사진을 찍어 올리고 연락을 한다. 정작 내가 지금 있는 곳의 사람들은 배경이 되어버린다. 그러면서 여행 전에 꼭 공부하곤 했던 각 나라의 문화나 역사도 흐릿해진다. 나는 아직 영향을 끼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성공 후로 미룬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속으로는 알고 스스로를 미워한다.


필립 키요도 자기혐오 끝에 잊기 위해, 죽기 위해 우도로 도망쳐왔다. 그것도 모르고 준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외국인 남자에게서 아버지를 느끼고 그를 성가시게 하고, 끝내는 살린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어른이 된다.


소설에는 대단한 결말이 없다. 두 사람은 각자 섬을 떠나 미뤄왔던 현실을 마주할 뿐이다. 제주도를 휩쓴 한국 현대사의 질곡도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종군기자 출신 미국인과 미군 아버지를 둔 혼혈아 사이 유대를 통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여행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행의 목적지 또한 관광지, 휴양지일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곳이니깐. 제주도를 다녀온 후 관련 책들을 읽으며 다음번에는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수상한 소금밭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whlMco9bm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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