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네 번째 편지
주방장과 숙소 주인은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서는 내게 환한 미소를 보내며 다음 여행지에서도 행운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했다.
나 역시 그들의 행복을 빌고 돌아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들이 나보다 앞서 릭샤를 잡아둔 것을 발견하고 놀라 뒤돌아봤다.
그들은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짧은 만남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것에 감동하며 릭샤에 올라탔다.
역으로 향하는 릭샤는 가격조차 흥정되어 있었다.
호의로 가득한 세상에 둘러 싸여 티끌하나 없는 마음으로 도시의 밤을 본다.
릭샤가 어둠을 뚫고 달리는 동안 도시의 밤은 낯설고 상인들과 시민들이 없는 도로는 유독 넓게 느껴졌다.
도시의 을씨년 스런 풍경과 별개로 배웅하던 이들의 따스함을 건네받은 내 마음의 안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혼자 여행하는 동안 타인과 관계로 인한 티끌이 내 하루를 침범하는 일은 드물어 관계로 인한 영향을 느끼지 못하다가, 관계가 없음으로 인해 오는 내면의 평화보다 관계가 원만함으로 인해 오는 평안함이 크고 깊다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한 기분에 음악을 틀고 흥얼거렸다.
열차 도착 시간을 넉넉히 남기고 기차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오지 않는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기차는 만석이었다.
야간열차에도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사람들을 사이를 헤치고 배정칸을 찾았다.
입구 쪽의 1층.
되도록 화장실에서 먼 칸에 앉고 싶었고 가장 위층 침대를 원했지만 정반대로 예약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모든 것을 달관한 체 짐을 정리하고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냄새가 심하면 어쩌나 바닥에서 발냄새가 고약하게 올라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동안 한차례 흔들린 기차가 출발했고, 사람들은 자리를 잡은 즉시 침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명이 눕기 시작하면 저마다 침상을 펼칠 수밖에 없는 구조기에 나도 잘 준비를 해야 했다.
1층은 사람들이 앉아있던 자리이기 때문에 2층, 3층의 침대로 이들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다행히 악취는 없었다.
여행자들이 가장 밑칸은 냄새 때문에 힘들다고 했는데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 불이 꺼지고 몸을 뉘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문이 열릴 때마다 틈으로 비추는 전등 불빛이 눈가를 스치고 발치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내쪽을 향해 일렬로 앉아있다.
좌석을 펼쳐 침대 형태로 만드는 좌측열과 달리 우측 창가 쪽은 창문을 등지고 일렬로 앉아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상상이 만든 시선을 느낀다.
눕기 전엔 머리를 창문 쪽으로 둬야 할지 통로 쪽으로 향해야 할지 고민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맡은 편 이는 머리를 통로 쪽으로 뒀고 내 위 2층에 누운 이는 머리를 창가 쪽에 뒀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의 발이 가까웠다.
누운 채 보조등으로 희미한 기차 내부의 낯섦을 더듬는다.
위에 누운 이의 침대로 인해 몹시 낮은 나의 천장, 낡았으나 흔들림 없는 창문, 고르릉 나지막이 코를 고는 맡은 편 남자, 바닥에 흩어진 사람들의 신발들, 누군가의 짐에서 삐져나온 줄 하나,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이의 그림자.
누군가의 기침소리, 뒤척이는 누군가의 인기척,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희미한 진동.
잠시 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밤새 평온한 잠자리였습니다.
내내 깊은 잠을 잔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기차 내부가 좋다는 사실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기차를 타기 전 상상하기에 기내에 먼지가 가득하고, 냄새가 나고, 추위에 떨며 새벽을 보내야 할 것 같았으나 모든 것은 기우일 뿐이었습니다.
기차 내부는 청결했고 미약한 히터를 틀어준 덕분에 춥지 않았습니다.
온기의 미약함 마저 기차를 채운 사람들의 체온이 더해지며 적당했습니다.
야간열차에 대한 두려움에 구입한 침낭은 베개로 쓰다가 다섯 시쯤 새벽 특유의 한기가 느껴질 때 폈습니다.
이게 뭐라고 나를 위한 요새이자 보금자리 같아서 기분 좋습니다.
호스텔 일인실의 시멘트 벽이나 렌터카의 강철에 둘러싸이지 않고 연약한 솜털에 둘러싸인 곳도 보금자리로 느낀 다는 것은 즐거운 사실입니다.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은폐한 채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이내 답답해져서 침낭의 지퍼는 모두 열어둔 채 다양한 모양으로 아홉 시가 넘도록 누워있다가 2층에 있는 이가 침대를 접고 앉아도 되겠냐는 요청을 하고서야 비로써 무거운 몸뚱이를 움직였습니다.
나는 한낮의 뚱뚱한 고양이보다 게으릅니다.
세상은 밝았습니다.
기차 안에서 나른한 아침이 시작됐습니다.
내가 있는 칸과 그 옆까지 적어도 열둘이 넘는 대가족이 탔고 그들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게 좋습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은 내가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입니다.
칭얼거릴 때 아이들의 언어에는 명확한 형태가 없고 감정만이 존재해서 이국의 언어를 몰라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엔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평소 즐겨 놀던 세상의 방대함은 좁은 기차가 품을 수 없고, 어른들의 달콤한 휴식이 그들의 지루함입니다.
아이의 휴식은 수면이 의지를 지배하는 그 순간뿐입니다.
움직이고 떠들고 놀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그 칭얼거림을 달래고 옆 칸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잡아오는 동안 창가에 앉는 행운을 얻었지만 작열하는 태양이 이쪽 편에 있기에 커튼을 젖힐 수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기차를 타기 전, 승강장의 간이 편의점에서 짜이 한잔을 요청하고 주머니에서 루피를 찾는 동안 앞서 생수를 구입하던 남성이 거스름 돈으로 내 짜이 값을 지불하고 행운을 빌었습니다.
불쑥 다가온 호의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하고 한잔을 소중하게 마셨습니다.
매우 진하고 달았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 사내도 같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멋쩍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는 부인과 아들 이렇게 세명의 가족 여행을 가는 길이라며 뒤쪽을 손짓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그의 가족과도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차는 오지 않았고 그는 나의 이야기를 몹시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내가 손짓하고 있어 반가움이 일었습니다.
혼자 여행을 하는 탓인지 누군가 내 이름만 불러도 반가움이 움틉니다.
그는 가족들이 있는 칸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새로운 날에 대한 안부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했는데 주로 그가 질문하고 내가 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전날 승강장에서 둘이 대화를 나눌 때는 꽤나 열린 사내였으나 자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꽤나 닫힌 사내였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는 나를 통해서 아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해서 대학교에 가고 좋은 회사에 갔으니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며 그간 아들에게 했던 말의 신빙성을 나를 통해 구하고 있습니다.
비우려고 노력하는 내 앞에 채우려고 노력하는 삶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나라에서 그의 말처럼 부유하지 않고, 여행이 여유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욕구로 인한 내적 갈등에서 시작했으나 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목표였던 것이 아니라 순간의 최선을 다했을 뿐임 역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달랐으므로.
그의 눈에 비친 나와 내가 보는 나의 삶이 달랐으므로.
그의 세상이 나의 세상과 달랐으므로.
삶은 전쟁과도 같고 나는 나 자신의 나약함과 싸워야 하는데 껍질을 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는 아직 스스로의 상태를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할 만큼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이미 답을 구하고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그저 가만히 미소 짓다가 아들의 억눌린 모습이 눈에 밟혀서 '공부도 좋지만 노는 것도 중요하다. 인생을 즐겨라'는 상투적이지만 그게 전부인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즐기라는 말이 뱉고 나니 맴돕니다.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이지만 그 확률이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적 통념과 그 확률이 가리키는 경제적 부와 안정을 기반으로 한 풍요를 되짚어보다가 아찔해졌다.
현대 사회가 재력으로 많은 것을 재단하려 하고 재력이 삶에 꽤나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부가 삶의 불행을 좌우하지 않고, 미래를 결정짓지 않으며, 사회적 통념의 방향이 정답은 아니다.
사람의 삶은 그런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믿고 있다.
자녀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헤아리다가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커튼을 열었다.
어느새 휘어진 선로에 햇살은 창문을 비켜 내렸고 세상은 밝았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메모장을 열었다.
잘 산다는 것은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돈을 더 벌었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평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적었다.
타인과 비교를 내려놓는 것이 나의 선.
자신의 삶을 감당하고 책임지는 것일 뿐이다.라고도 적었다.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자녀로서 도리를 다하고, 나와 타인을 사랑하고, 삶을 일구고, 소망을 품고, 가진 바 재능을 발견하거나 또 다른 재능을 숙련하고,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가정 안에서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에 도움이 되고 그런 것.
삶의 희로애락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
인도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주방에만 있는 사람.
이곳에서 숙식하며 각종 허드렛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
뙤약볕 아래서 꽃다발을 만드는 사람들과 인적인 드문 도로 위에 과일을 파는 사람.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타인과 견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타인의 삶을 평할 자격과 권리가 없으며 알 수도 없다.
그들이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그저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삶을 감당하고 책임지고 있는가.라고 적었다.
감당과 책임이라는 단어에 연거푸 동그라미를 그렸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동심원을 퍼트리듯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삶은 거대하고 막연했다.
'지금은'이란 단서를 달았다. 지금은 무엇을 감당하려 하나.
청춘이라 여기는 나의 짐은 나로서 사는 것.
비로소 나는 나로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선택하고 있고, 이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기를 약속하고 감내하고 있으니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다.
오전 열한 시가 되면서 더울만하니까 에어컨이 나왔습니다.
달궈진 공기를 밀어내고 다가오는 서늘함을 느끼며 이 얼마나 좋은 기차 인가 감탄하다가 잠시 꿀 같은 쪽잠을 잤습니다.
화두로 인해 달궈진 머리도 식었습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눈을 떴을 땐 다들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급히 켠 구글맵을 통해 목적지에 가까웠음을 알았습니다.
잠시 후 도착한 기차역에서 그 가족을 찾았습니다.
그가 베푼 한잔의 짜이로 인해 닿은 인연과 가족과 대화를 통해 얻은 화두를 사진으로 남깁니다.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 도통 타이밍을 못 잡아서 사진은 괴상하게 돼버렸지만 소중히 간직하고 그에게도 이메일로 사진을 전했습니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니 숙소에서 준비한 픽업 기사가 크게 KIM이라고 써진 팻말을 들고 서있습니다.
한국에 얼마나 많은 KIM이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기차역에서 KIM은 내가 유일합니다.
그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숙소로 가는 길에 베트남을 떠올렸습니다.
수없이 많은 오토바이의 행렬과 교실의 아이들과 신짜오를 외치던 나와 스텝들과 봉사자 숙소 일층에 모여있던 것과 동네 술집에 모여 게임하던 것과 호안끼엠에서 놀던 것과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한국어 배우는 학생들과 매일 찾아가던 쌀국숫집과 밤마다 먹던 반미와 달달하던 쓰어다.
그때 나는 세상의 초입에 있었고 타인을 돕는 일상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도로의 울퉁함에 한차례 크게 오토바이가 덜컥거리면서 나는 인도로 돌아옵니다.
자이살메르는 이전의 도시보다 황폐하고 사막화됐고, 삼십 도에 가까운 기온 특유의 느낌과 사막 지역의 색감이 어우러져서 매우 평화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숙소까지 오던 길이 다소 삭막했기에 이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막막하여 짐을 두고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곳이 외곽인지 도시의 형태는 보이지 않고 황량한 땅이 드넓습니다.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포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몸을 돌렸을 때 문 없이 틔인 주방이 보였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으나 어젯밤 숙소를 떠난 이후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메뉴 중 가장 저렴한 계란 볶음밥을 주문하고 앉아 주방을 봅니다.
열다섯 살쯤 됐을까, 살짝 기울어진 큰 눈, 짧고 더벅한 머리, 마르고 긴 몸, 어눌한 목소리를 가진 소년이 주방을 보조하고 있었는데 나를 흘깃거리기에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습니다.
수줍게 웃는 소년에게 이번엔 팔을 크게 벌리며 많이 달라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배를 어루만지며 배가 고프다는 표정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수줍게 웃은 소년은 주방장에게 달려가 뭔가를 전하는 듯했습니다.
삼십 분쯤이 지나 밥을 받아보니 정말 많은 밥을 계란과 함께 볶았습니다.
희미한 버터향과 카레 향이 났으나 밥을 많이 한 탓인지 간이 부족합니다.
작고 매운 고추를 몇 개 얻어서 곁들여 먹다가 끝내 런던에서 얻은 간편 시래깃국을 뜨거운 물에 풀었습니다.
떡진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 뒤 곧장 밖으로 나와 숙소 근처부터 빙 둘러보고 포트로 향합니다.
일전에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도시는 포트에서 시작하거나 포트에서 끝나는데 도시 형태를 내려다보기 위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일본 여행자를 통해 본 사진이 있기 때문에 이곳 포트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곳은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실제 그곳이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가 왔던 장소에 내가 왔다는 것으로 이미 특별함이 됐습니다.
포트가 있는 쪽이 중심가인지 시장과 상점이 밀집해 있었고 전통 의상 관련된 곳이 많아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전통 의상이란 선명한 색으로 화려한 것과 사막 유목민들이 입을 듯한 희고 단조로운 것으로 나뉘는 듯했고, 사막을 통과할 때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싶어서 흥정 끝에 옷과 스카프를 350루피에 샀습니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가 처음에 부른 가격이 1000루피였기에 꽤나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옷이 담긴 검정 봉지를 들고서 걷다 보니 도착한 포트는 거대한 성과 같습니다.
이전에 상상하던 인도의 이미지는 공항에 도착한 첫날 도심을 보며 변형됐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어쩌면 이런 곳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포트로 들어가는 비탈길 앞에 서서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에 감탄사를 뱉어 냈습니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길엔 거대한 양탄자를 파는 상인, 전통 의상과 가방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고, 성벽 안에는 또 다른 마을이 있었습니다.
길을 물어가며 상점과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니 성벽 상단의 끝이었고 자이살메르가 눈앞에 있습니다.
나는 많이 가벼워졌다.
여행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에 앞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던 그날 나를 붙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어내며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여행을 하면서 극적이고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변화가 내게 찾아오길 원하지만 사실 마음속엔 여행을 떠나던 날 모든 변화가 찾아왔음을 알고 있다.
누군가 말하길 각자의 삶은 많은 세월이 흘러 뒤돌아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한 사람은 평생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회사를 확장시키는데 몰두했다.
다른 이는 평생 자영업을 하며 가정을 일구고 자녀들을 뒷바라지했다.
서로의 업도 달랐고 생계도 달랐고 사는 곳과 일꾼 가정도 달랐다.
모든 게 다르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서 세끼의 밥을 먹고 각자의 일을 하고 여가의 시간을 보내는 형태는 모두 동일한가 보다.
아주 먼 곳에서 볼 때 각자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각자의 인생 속 찰나의 순간들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고, 결과와 형태가 수많은 과정을 대변해 버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볼 수 있는 그림,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수많은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한 비틀림 속에 그때마다의 삶이 있다.
어느 영화 제목을 일부 인용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른 것이 있다.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같지 않다.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삶의 어느 때에, 그때 판단하고, 그때만 느끼고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나 결과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때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시간의 질감이 개인에게만 남는다.
나는 나로서 살기 위해 발을 내디뎌 그 족적을 내 삶에 남기고 있었다.
요새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이살메르는 사막과 어우러진 황토색의 도시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도시 규모가 작기 때문인지 도시밖의 황량한 대지가 광활하기 때문인지 포트를 중심으로 밀집된 시가지는 요새의 연장선 같습니다.
황토색의 집들이 요새 끝자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옥상마다 팔을 흔들며 연을 띄우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해 질 무렵까지 나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시선을 앞으로 던지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빠르게 흘러가고 많은 것이 마음에 들어오고 나갔습니다.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은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연상케 했고 사막에 가깝다는 것에서 기존의 세상과 아득히 멀어진 느낌을 받습니다.
주변에 몇몇 여행자들이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고 저마다 사색을 하다가 떠났습니다.
내내 동쪽 성벽에서 도시를 보다가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 나는 발을 내딛지 못하고 우두커니 섰습니다.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타고 있습니다.
다급히 발을 놀려 서쪽 성벽 끝에 섰습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는 황량한 땅 위로 하늘은 높았고 나 역시 성벽에 서서 높았습니다.
시야 가득히 붉은 세상을 봅니다.
기차 안에서 아버지 옆에 앉아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회사를 멈추고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에 흔들리던 엄마의 눈동자도 떠올랐습니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태연을 가장해도 어둠은 두려웠고 숙소가 생각보다 외곽에 있어서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잰걸음으로 오는 동안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동네 아이들이 큰 위안이 됐습니다.
주방의 식구들에게 정답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중에 있는 만큼을 지불하고 샌드위치를 얻어먹었습니다.
인도에 온 이후로 많은 것을 먹지 않고도 크게 허기지지 않고 몸이 가벼운 느낌이 좋습니다.
열기가 식은 도시에 산들한 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미소를 머금다가 맥주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주방장은 크게 웃더니 맥주는 밖에서 사 왔어야 했다며 유감이라고 했습니다.
방으로 가기엔 이 밤이 아쉬워서 주방 한편에 앉아 같이 노래를 듣고, 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방을 보조하는 소년의 이름은 아뿌라고 했습니다.
아뿌는 말이 어눌했고 주방장은 유쾌했고 대화보단 적막이 많았지만 즐겁고 평화로웠습니다.
콜카타에서 석사과정을 앞둔 대학생 무리가 옥상 한편에서 떠들썩하다가 하나 둘 옥상을 떠나고 탁자 위의 조명이 꺼져 옥상 위가 어두워질 때쯤 아뿌가 어디선가 맥주 한 병을 들고 왔습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함박웃음 짓는 나를 보고 주방장과 소년은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습니다.
수많은 별 아래 취기가 돌아 마음이 들뜨고 몸은 나른합니다.
아뿌에게는 별도의 방이 없습니다.
하루종일 옥상의 부엌을 맴돌며 주방을 보조하고 숙소 내의 잡일을 합니다.
손님들이 자리를 비우고 할 일마저 없을 때엔 구석 한편에서 잠을 자거나 허공을 봅니다.
나른한 몸을 기댄 채 하늘을 보는 내 곁에서 그 역시 하늘을 봅니다.
그의 하루는 어떻게 지나가는지 헤아릴 수도 그 헤아림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야간열차가 어제와 오늘을 이어둔 탓에 몹시도 긴 하루였지만 피로는 느낄새 없고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불이 모두 꺼진 뒤에도 옥상에서 하늘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내 마음은 석양처럼 온통 붉었습니다.
나는 즐기고 있습니다.
즐기는 자의 세상은 방대하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