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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준 Apr 12. 2024

철학강독, 정확하게 읽는다.

[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7] 인문반 철학수업 톺아보기⑴

1.

지혜학교 6학년 학생들은 학기 초에 고졸 검정고시를 치르고 난 뒤에 4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인문반 공부에 들어간다. 철학수업도 이 시기부터 진행된다. 세 꼭지로 이루어진 철학수업 중 첫 번째 수업은 화요일에 진행하는 ‘철학강독’ 수업이다. 철학 텍스트를 ‘읽는’ 수업이다. 수업 시작 종이 치면 학생들이 책을 챙기고 자기 책상에 주섬주섬 앉는다. ‘검정고시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거 쉬엄쉬엄 합시다!’하는 표정이다.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학생들이 한 두 마디씩 던지는 농담 섞인 인사에도 얼른 표정을 지우고 딱딱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 책을 폅시다. 수업 방식을 설명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한 명씩 소리 내어 한 문단을 읽습니다. 그리고 읽은 문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됩니다.” 


학생들은, ‘이쯤이야, 뭐 식은 죽 먹기군요!’ 하는 표정이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읽는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먼저 읽은 사람이 다음 읽을 사람을 아무나 지목하면 됩니다. 지목당한 사람이 다음 문단을 읽기 전에, 앞사람이 읽은 문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야 합니다. 문단을 읽은 사람이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요약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목을 당하자마자 ‘곧바로’ 한 문장으로 요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는 표정을 짓지만, 나는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여차저차 돌아가면서 한 명씩 읽고 다음 사람을 지목한다. 지목당한 학생은 허둥지둥 문단을 요약한다. 주요 개념을 놓치거나, 핵심 의미를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면 내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개념을 찾아 주고, 의미를 확인시켜 준다. 자신의 말로 요약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는 문단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문장’을 찾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대개 문단에서 중요한 문장은 문단의 앞이나 뒤에 나온다. 


▲ 철학강독 수업 장면 2017년, 5명의 인문반 학생들과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꼼꼼히 읽고 있다

이런 읽기를 낯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 두 번 정도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한 학생이 문단을 읽을 때, 나머지 학생들은 연필을 들고, 중요 개념에 동그라미 치고, 뭔가 중요해 보이는 문장에 밑줄 그으며, 떠오르는 질문이나 생각을 여백에 빠르게 메모해 두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야 문단 요약을 제때, 제대로 할 수 있으며, 예상치 못하게 지목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바로 문단을 요약할 수 있다.  


몇 번 하고 나면 학생들이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한다. 곧잘 따라온다. 학생들의 변화에 뿌듯함이 올라오지만,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고삐를 늦추기 않고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그럼 여러분, 이 문장은, 이 개념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자는 여기서 왜 이런 주장을 제시할까요?” 학생들은 대답을 머뭇거린다. 그러면 나는 또 묻는다. “여러분!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냐고 묻지 않고 왜 가만히 앉아 있는 거죠?” “왜 모르는데, 묻지 않습니까?” 


2.

나는 6학년 인문반 수업에서만큼은 학생들을 힘껏 몰아붙인다. 학생들은 긴장한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에도 지난 9년 동안 한 명의 학생도 이런 빡빡한 수업 방식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을지언정, ‘부당’하다고 항의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목표가 있으며, 학생들은 최소한 그 목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이 문단 요약이 서투르거나, 중요 문장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목소리 크기나 높이의 변화 없이 몇 번이고 재차 설명하거나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또 시범을 보인다. 단어의 의미를 모르거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 모르는 내용은 가르쳐 주거나 자료를 찾아서 공유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수업 ‘내용’에 있어서는 학생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학생들의 수업 ‘태도’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내가 학생들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선생에 대한 예의, 수업에 대한 성실성 등의 태도가 아니다. 바로 글과 생각, 즉 ‘텍스트에 대한 진지한 태도’이다. 


글자를 읽어 내려간다고 텍스트를 읽는 게 아니다. 이해를 하면서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이해를 한다는 것은 텍스트를 떠받치고 있는 개념의 의미를 알고 구조를 파악하면서 읽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을 하면서 읽는 것이며 질문을 던지면서 읽는 것이기도 하다. 의자를 당겨 앉고 허리를 세우며 눈을 크게 떠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학생들은 딱딱한 철학책을 읽을 때, 글줄을 설렁설렁 눈으로 훑으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읽어왔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대충 짐작하고 넘어갔다. 별 다른 생각도 질문도 없이 글자만 읽어 내려가거나, 어떤 글을 읽든지 간에 그 글과 별 상관이 없는 공상을 펼치거나 겉멋 가득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습성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철저하게 읽기’에 집중해야 한다. 철학강독 시간은 텍스트를 철저하게 읽기 위한 훈련으로 가득하다. 그럼 왜 이런 빡빡한 훈련이 필요한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자신의 생각을 잘 펼치기 위해서, 질문을 잘 던지기 위해서이다. 어설프게 읽고 섣부르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한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마치 입시 교육에서 정답을 찾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맞다. 마치 정답을 찾는 것처럼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입시 시험에서는 정답을 찾고 나면, ‘다음 문제’(그것도 다른 이가 던지는 문제!)로 넘어가지만, 우리의 공부는 정답을 찾고 나면 철학자가 제시하는 그 정답에 대해 ‘자기 물음’을 다시 던진다. 그러기 위해 정확하게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텍스트를 섣부르게 훑어내려가면 누구나 할 법한 표면적인 질문에 그치지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나만의 고유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는 내가 나의 지도교수로부터 배운, ‘비판의 깊이는 이해의 철저성에 비례’한다는 점을, 나의 학생들에게 또다시 가르쳐 주는 과정인 셈이다.


이런 방식의 읽기에 어울리는 텍스트는 따로 있다. 철학자의 사상을 잘 요약·정리하고 해설한 ‘2차 텍스트’는 피해야 한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알기 쉽게 잘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저자는 주장을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전달자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저자를 상대로 질문을 던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철학자가 다루는 ‘주요 개념’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 개념들은 어떤 ‘철학적 문제’에 걸려 있으며, 또 그 문제가 어떤 ‘다른 문제’로 이어지고 논리적으로 전개되는지 꼼꼼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며 따져 묻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직접 쓴 ‘1차 텍스트’를 다루어야 한다. (그동안 어떤 텍스트들을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 다룰 것이다.)    


▲ 2024년 4월 수업 장면 5학년(고2) 학생들과 플라톤의 <향연>을 꼼꼼하게 읽고 있다.


3. 

이렇게 2시간의 ‘철학강독’ 수업이 끝났다.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한숨을 내쉰다. 수업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과제를 해야 하는 부담감이 뒤섞여 밀려온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음 날, 철학토론수업(‘철학연습’)을 위한 숙제를 작성해서 저녁까지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읽은 부분에서 ‘토론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궁금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질문을 만들어 내지? 그렇다고 내일 수업에 빈 손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아, 막막하다. 어떻게든 토론 질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수업은 끝났지만 공부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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