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준 May 17. 2024

학교에서 ‘협력’을 배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12] 지혜학교 기초과정 교육의 의의

오늘부터 6주 동안 <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의 3부에 해당하는 글이 연재될 것이다. 지혜학교 철학교육의 배경이자 토대로서 ‘지혜학교의 교육과정’과 그 운영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를 UNESCO 및 OECD에서 제시하는 미래 교육의 담론과 연결 지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1. 14~15세 지혜학교 학생들이 ‘협력’을 배우는 방법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혜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기초과정’에 소속된다. 기초과정, 말 그대로 지혜학교 공부의 ‘기초’를 배우고 익히는 기간이다. 시간표를 보면 기초가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선택수업을 제외하고 오직 필수수업만 나열해 보자. ‘독서-토론-글쓰기’, ‘음악’, ‘국어’, ‘생태’, ‘미술’, ‘과학’, ‘체육’, ‘프로젝트’다. 이런 공부를 통해 ‘글을 읽고 쓰는 힘’, ‘감정을 느끼고 다루는 힘’, ‘자연을 만나고 마주하는 힘’을 기른다. 이와 더불어 ‘프로젝트 수업’이 있다. 때마다 학생들이 함께 무언가를 기획하고, 시도하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경험을 쌓는 시간이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아우르고 한 데 묶는, 기초과정의 교육을 드러내는 표어가 있는데, 바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기초과정의 여러 교육 활동들은 학생들이 서로 함께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법’을 배우는 일로 수렴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전국에서 모인 20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을까? 바로 ‘협력’이다. 서로 다른 이들이 각자 힘을 한 데 모은 경험이 쌓일 때, 비로소 한 사람이 울 때 같이 울고, 한 사람이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협력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필수조건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온통 그럴 듯한 말들 뿐이다. 생각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멀리 갈 것 없이 지난 3월에 있었던 열린 주간의 활동을 떠올려보자. (지혜학교에서는 1년 동안 총 5번의 ‘열린 주간’ 활동을 진행한다. 한 달 중에 3주 동안 학교에서 공부한다면, 1주는 학교 밖으로 나가서 ‘열린’ 공부를 하는 방식이다.) 매년 3월 기초과정의 열린 주간은 사실상 친목 도모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집 떠나와 고생하는 신입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랑말랑한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했다. 이를테면 ‘광주 지역 먹거리 탐방, 자유 견학’ 등과 같은 같은 형식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시도를 했다. 삼삼오오 모둠 지어서 버스를 타고 광주 지역을 돌아다니되, ‘맛집’이 아니라 ‘공원’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실시간 검색을 하지 않고, 미리 식당을 검색하여 주소를 따로 적어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직접 찾아가서 식당에서 앉아 밥을 먹지 않고,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 통에 음식을 받아와서 공원에 둘러 앉아 밥을 먹기로 했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잔반을 남기지 않고 싹 비우고 공원 화장실에서 물로 씻어서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기초과정 교사들이 3월 열린 주간의 전체적인 형식을 발표하자 학생들의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는가?’, ‘우리가 고통스러운 게 교사들은 즐거운가?’ 항의가 빗발쳤다. 교사들은 여기서는 학생들을 달래고 저기서는 협박해 가며, 일을 진행시켰다. 결국 학생들은 교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봄 그리고 공원” 활동을 가까스로 시작했다.



모둠별로 세부 계획을 짜는 데에도 크고 작은 갈등이 빈번했다. 갈등이 일어났지만, 담당 교사는 일단 학생들 옆에서 기다렸다. 세부 기획 단계에서부터 서로 간에 할 말, 못 할 말이 오갔지만 그래도 기다렸다. 도저히 일이 진행되지 않을 만큼 감정이 격해질 때면 모든 일을 잠시 멈추고, 속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대화 자리를 만들었다. 교사는 굳이 상황을 정리하거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시간과 공간만을 마련했고, 학생들은 각자 자기 안의 이야기를 거칠게 쏟아냈다. 언뜻 보기에는 갈등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속 이야기를 쏟아내고 난 뒤에 서로 차분해졌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했으니, 이제 원활하게 활동을 했을까? 아니다. 계획을 세워도 여기저기서 빈틈이 벌어졌다. 날은 덥고, 식당 주소를 잘못 검색했고, 길은 잃어버렸고, 배는 고프고, 햇빛을 피해 쉴 수 있는 그늘은 찾아도 보이지 않고 ….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또 서로에게 화가 났다. 또다시 모진 말이 오가고 감정이 폭발했다. 더 이상 정상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교사가 전체 대화 자리를 마련한다.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물어본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화가 났는가’, ‘왜 지금도 같은 문제를 되풀이 하는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이 화가 나는가?’,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해라’, ‘상대방의 말을 끊지 말고 충분히 들어보자’. 학생들이 날 서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온통 남 탓만을 늘어 놓으면 이야기를 한참 듣던 교사는 한 번씩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방금 이야기한 그 문제를 너도 저지르지 않았는가?’, ‘너는 이 문제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가? 한 치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대화를 몇 차례 반복한 후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학생들은 이번 활동에서 서로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책임의 수준을 적절하게 조율하기에 이른다. 활동이 끝날 때쯤에야 협력이 가까스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해 듣기로는 마지막 식사 시간에 광주 어느 공원 벚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간만에(!) 맛있는 치킨을 손에 들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 잎을보며 ‘함께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한다.



2. 유네스코 2050, 협력과 연대의 교육



2020년 전후로 미래교육이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의 고도화, 디지털 네트워크의 확산 등의 변화 속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세계 곳곳의 하늘 위로는 대규모 살상 무기들이 날아다니고 그 아래에서 많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다. 여러 위협들 앞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가 절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두드러진다. OECD나 UNESCO에서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늦기전에 ‘변혁’(transform)을 해야 하며,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변혁을 이끌어내는 교육을 함께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이하 유네스코 2050) ‘협력과 연대의 교육’이 눈에 들어온다.



“교육은 다양성의 가치에 대한 학습을 넘어, 다양한 그룹, 지식체계 및 관습과의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대화에 필요한 기능, 가치 및 조건을 증진해야 합니다. 상호 문화적 시민의식의 기초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출발점입니다.” <유네스코 2050>, 3장 ‘협력과 연대의 교육학’ 중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쉽다. 그러나 (지혜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 그것도 민주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매우 어렵다. 대개의 경우 듣기 싫은 말에는 귀를 닫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몇몇 기술들을 배우고 익히면 약간 도움이 될 것이다. 경청하는 방법을 미리 배우고, 이야기를 나눌 때 생각을 펼치는 단계와 모으는 단계로 나누고, 힘겨운 역동을 다루기 위해 문제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포괄적인 해법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연습하면, 중구난방으로 뻗치는 이야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사용하는 나 자신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출발점”이므로, 우리는 대화의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협력하기 위해서 먼저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국영수 입시 문제집을 푼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은 바로 여럿이 함께 새로운 일에 뛰어 들어서 ‘시행착오’를 겪어보는 일이다.



“함께 모여, 서로가 미처 몰랐던 현실을 탐구하고, 확립된 지식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어렵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교육 환경은 학습자가 실험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창조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 심지어 피난처이어야 합니다. 교육학은 상상력과 창조적 사고를 자극하고, 실수를 하고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지적 자유를 증진해야 합니다. 때때로 혼잡한 이러한 학습 활동을 허용하고 가능하게 하는 환경은 진정한 이해, 공감, 윤리적 틀을 발달시키고, 이해와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교육자는 학생들이 새로운 아이디어 및 어려운 지식과 씨름할 때, 자신의 취약함이 드러나고 질책당할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유네스코 2050>, 3장 ‘협력과 연대의 교육학’ 중



미래의 학교는 생각한 바대로 실험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창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겉보기에 위험할 수 있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낯선 일에 뛰어들어 애써보고 실패해야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수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결핍에 대해 평가하고 지적하며, 끼어 들어서 뜯어 고치려는 어른들의 힘이 없을 때 학생은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옆사람에 대해서도 그만큼씩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3. 학교에서 협력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결론하여 말하자면, 학교에서 협력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과 장소,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는 체험학습, 창의활동이 아니라, 마음껏 상상하고 계획하며 시도하고 시행착오 할 수 있는 ‘자신들의 경험’이 필요하다. 시행착오 속에서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자기가 한 이야기를 곱씹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위험한 속내를 다 쏟아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학생들 안에 힘이 있다고 믿고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교사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필요하며, 학생들의 거친 협력의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았다고하여 곧장 담임교사의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는 부모의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 안에서 학생들은 협력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할 것이다. 그래도 협력을 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할 것이다. 온 힘을 다해서, 나의 말을 쏟아내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상대방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며, 함께 지내다 보면 또 다른 일들로 새로운 갈등과 불화를 겪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 큰 기대도, 또 너무 큰 실망도 하지 않으며, 이렇게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한 뼘씩 자라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방법 말고, 학교에서 효율적이고 체계적이며, 안전하고 세련되게 협력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철학교육...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