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14]
1. 18-19세 학생들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다
14세에 지혜학교를 입학한 학생들이 4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다 보니 어느새 18세가 되었다. 기초과정과 본과정에서의 공부를 모두 마친 다음 마지막 과정인 심화과정에 들어선다. 심화과정에 들어서는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다음의 네 글자를 제시한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심화과정에 들어온 학생들은 이제 오직 한 가지에 몰두하는 공부를 한다. 올해 6학년 인문반 시간표를 보면, 철학, 국어, 역사, 사회, 지혜, 미술 등의 수업과 그 외 학생 자신이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자기개설수업이 있다. 5학년에는 학년 프로젝트로 '해외이동학습'이 있고, 6학년에는 '자서전 쓰기'를 진행한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지혜학교에서의 모든 종류의 공부를 정리하고 숙성시키며, 졸업 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심화과정에서의 공부를 통해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곱씹어서 오직 한 점에 집중시킨다고 할 때, 그 점이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점에서 주일무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활동은 6학년을 마무리하면서 진행하는 '자서전 쓰기'이다. 2016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인문반에서 학생들과 함께 철학책을 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문반 활동에서의 핵심은 철학 공부가 아니라 '자서전 쓰기'라고 생각한다. 철학 시간에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활동을 통해 배우고 익힌 생각들도 자서전 쓰기로 수렴되어야 한다. 학생들 각자가 지난 19년의 삶을 돌이켜 생각하고 곱씹어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어떻게 학생들을 성장시키는지 매년 목격하기 때문이다.
6학년에서 배우는 다양한 활동들이 자서전 쓰기로 이어지는데, 직접적으로는 국어 수업에서의 문학 비평 수업이 있다. 몇 가지 작품들을 선정하여 꼼꼼히 읽어내며, 학생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주요 장면들, 사건들을 엮어 내어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훈련을 한다. 작품을 내부에 머물러 여러 요소들을 뽑아내고 엮어내며 자신의 의미를 찾는가 하면, 작품의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대를 함께 읽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비평 훈련은 6학년을 마무리하는 시기, 자서전 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해석해 내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지혜학교에서의 6년뿐만 아니라, 지난 19년의 삶 전체를 돌이켜 보며, 지난 인생의 경험이 가지는 의미를 매듭짓고, 앞으로 펼치질 삶을 기획하는 과정인 것이다.
2. 진로 교육 또는 교육의 진로, 불확실한 시대에 고민해야 할 확실한 것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 2050>에서는 불확실한 시대의 노동의 장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직업의 미래를 들여다 보면 도전받는 그림이 드러난다.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과 같은 기술 발전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며, 아마도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준비가 가장 덜 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녹색 경제 실현을 위해 우리가 지속가능한 실천과 청정 기술을 채택하게 되면 수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다. 하지만 각국이 탄소 집약적이고 자원 집약적인 산업 규모를 줄임에 따라 다른 일자리들은 사라질 것이다.
플랫폼 경제로 인해 19세기의 노동 관행이 다시 생겨나고 미래 세대는 '디지털 일용 노동자'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기술은 미래의 직장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잘 맞지 않을 수 있고, 그러면 많은 기술들이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 2050, '제2장, 혼란과 점점 드러나는 변화들' 중>
이제는 익숙해진 묵시록이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이 사회에 나가서는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 지금 기성세대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일이 미래 세대에게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은 널리 퍼진 불안이다. 교단에서 학생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유네스코에서는 그럼에도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서 교육이 가지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육이 마땅히 사람들에게 평등한 경제적 기회를 보장하고 의미 있는 직업과 일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동시에 교육은 다른 정책 영역의 부적절성이 원인이 되어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고 광범위한 실업이 발생되는 것, 그리고 그런 원인이 계속 고쳐지지 않는 것까지 메워 줄 수는 없다."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 2050, '제2장, 혼란과 점점 드러나는 변화들' 중>
인간의 삶이 불확실성에 휘말리지 않도록, 개개인이 사회적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적절한 직업을 얻고 삶을 가꾸는 일을 촉진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향해 거는 기대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이 만능 키가 될 수는 없다. 교육정책이 노동정책을 포함한 다른 정책 영역과 긴밀히 조화를 이룰 때, 교육이 담당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을 혁신하고 적용하게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복잡한 과업을 수행하게 해줄 수 있다. 특히 고등교육은 정밀한 지식과 인지 능력을 갖추고 그 지식과 기술을 사용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을 배출한다. 취업을 위한 교육이나 기업가적 기술 개발을 위한 교육에만 집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교육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과 지역 사회를 위해 장기적인 사회·경제적 웰빙을 창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 2050, '제2장, 혼란과 점점 드러나는 변화들' 중>
기술의 힘이 더욱 커진 시대에, 인간은 '기술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취업을 위해서 기술에 적응하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과 더불어 사는 삶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유네스코는 "자신과 가족과 지역 사회를 위해 장기적인 사회·경제적 웰빙을 창조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좋은 삶'(well-being)을 기획하고 실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진로 교육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교육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3. 자서전을 쓰는 일의 의미
▲ 2020년 꽃, 피다(6학년 마무리 발표회 장면) 20년 겨울, 6학년 학생이 자서전의 내용 중 일부를 발표하고 있다. ⓒ 지혜학교
여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쓰는 학생들이 있다. 지금껏 자신을 둘러싼 바깥일들에 매진하다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19년 동안 자기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금 이 자리에 끄집어 내어 곱씹어본다. 후회, 그리움, 만족, 안타까움... 여러 가지 기억들에 감정들이 묻어 나온다. 지나온 자신의 삶이 새삼스럽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휘몰아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성찰하는 힘, 자신감 등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다. 수년간 자서전 쓰기를 이끌어 온 담당 교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무엇보다 자서전 쓰기 활동은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 주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때문에 자서전 수업의 첫 번째 수업부터 늘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정직하고 진솔해야 한다.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다."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을 압니다. 인생에는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치부를,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자서전 쓰기 수업은 첫 번째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용기를 내어 자기 자신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고비를 넘어야만 학생들이 자기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학생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생각보다 자서전 쓰기에 꽤 진지하게 임합니다. 입으로는 '안 쓸거예요.' '그 이야기는 부끄러워서 절대 못 해요.' '정말 써도 돼요?' 하던 학생들도 자리를 잡고 옛 일들을 끄집어 내다보면 어느새 몰입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미래에서 우리 학생들이 '기술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 곳곳에 울려 퍼진다. 다들 '기술'이라는 말에 사로 잡혀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도대체 어떤 기술들이 얼마나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지 두렵다. 두려운 마음에 이걸 준비해야 할지, 저걸 대비해야 할지 우왕좌왕한다. 마음만 조급하다.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문득 저 문구에서 '삶'이라는 글자를 눈여겨 본다. 어떤 미래든지 간에 그곳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삶이 '좋은 삶'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삶이 그렇듯이) 근본적으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또 '자신과 화해하고 잘 지내야 한다'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이웃, 동료와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술이라는 문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으로서 잘 사는 일(Well-being)이 중요하다.
지혜학교 6년 공부의 끝자락에 이루어지는 자서전 쓰기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사람으로 잘 살기 위해서, '자신에게 집중하기'. '돌이켜 봄으로써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