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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준 May 18. 2023

불화不和하는 삶에 대해

김혜진_<딸에 대하여>에 관한 단상

삶은 고단하다. 엄마의 독백에 담긴 세상은 각박하고, 엄마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제각기 고달프다. 엄마와 딸, 딸의 연인, 젠뿐만 아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윗집 새댁과 아이들, 이주 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고 있는 띠팟, 제 어미를 다른 병원에 맡기고 자신은 또 다른 노인을 돌봐야 하는 새댁(요양보호사), 세상 물정에 밝고 눈치가 빠른, 아니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삶을 살았을 교수 부인 등. 면면을 떠올려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느 하나 편안하게 발 뻗고 사는 사람 없다.


삶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런 고통은 서서히 사람을 움츠리게 만든다. 웃음을 지워 버린다. 날이 번뜩 서게 만든다. 엄마의 말처럼 세상 모두가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다. 기대고 쉴 수 있는 남편은 진즉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애지중지 키운 딸은 이제 제멋대로 굴면서 어떤 여자와 7년이나 같이 살고 있다. 동성인데 연인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가 하면 엄마가 일하고 있는 요양병원에서는 환자를 ‘간호’ 하지 말고 적당히 ‘관리’하라고 요양보호사들을 들들 볶고 있다. 엄마는 끝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렇게 엄마는 자신의 고단한 삶을 버티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엄마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엄마 자신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삶의 고단함에 더해 누가 떠밀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여느 요양보호사들처럼 일하지 않는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들 그러는데, 뭘 유별하게 그러냐’라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살갗이 짓무르든 말든 상관없이 사타구니를 비닐로 꽁꽁 싸매고 그 위에 기저귀를 가위로 자르고 또 잘라 몇 번을 나누어 쓰는 일을 기어이 거부한다. 기저귀 하나를 온전하게 쓰다가 병원의 권 과장에게 지적받고, 파견업체 사무실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으면서도 엄마는 젠을 ‘제대로’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일자리를 내던지면서까지 싸우고, 다른 병원으로 내쳐진 젠을 끝까지 찾아내어 구출해낸다. 이쯤 되면 외골수라고 봐야 한다. 다들 적당히 사는데, 엄마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니면서 그토록 세상과 ‘불화’하는가.


딸은 분명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자신의 동료가 동성애자 또는 동성애를 소재로 수업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당하게 강단에서 쫓겨나갔을 때, 엄마가 그랬듯이 생계가 달린 강의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오랜 시간을 꼬박 길거리에서 보낸다. 밀린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전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간다. 심지어 몸싸움으로 흉터까지 가지고 온다. 엄마는 그런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딸이 아니라 그런 딸이 자신을 닮았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단순히 세상과 불화하는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다. 불화하는 이유도 엄마와 딸은 데칼코마니처럼 꼭 닮아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법적으로 ‘가족’ 보호자만이 환자의 입·퇴원 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규정)을 뛰어넘어 젠을 기어코 구해낸 뒤 마지막 며칠을 자신의 집에서 ‘가족’으로서 지냈듯, 딸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을 무시하고 동성 연인과 가족으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 마지막에 엄마의 염려와는 달리, 엄마는 우여곡절을 겪고서라도 딸을, 아니 ‘그린’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까지 넘긴 나는 새로운 듯 익숙한 혼란에 빠진다. 내가 마주한 혼란은 이런 것이다. “도대체 (엄마나 딸처럼) 세상과 불화하는 힘은 어떻게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힘은 기질로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길러지는 것인가? 길러진다면 어떻게 길러진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나는 진심으로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나의 아이들이, 나의 짝꿍이, 나 자신이 정말 세상과 불화하는 삶을 살아내길 바라는가? 사실은 적당히 불화하는 척, 흉내 내다가 적당히 세상에 휩쓸려 들어가 적당히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로는 엄마에게, 때로는 딸에게, 때로는 젠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책장을 넘기던 것과는 달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제 나의 모습은 요양 병원의 ‘권 과장’이나, 아무리 좋게 봐도 뒤에서 불만을 쏟아 내거나 병원 관계자들 몰래 젠의 새로운 병원을 엄마에게 알려주는 ‘새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깜냥으로 처음에 글을 쓰려고 노트에 끄적였던 질문들, 즉 소설 속의 엄마가 일상을 살아내며 마주하는 ‘고단함’과 세상과 적극적으로 불화하면서 겪는 ‘고통’이 어떻게 다른지, 엄마가 세상과 불화하며 파열음을 내는 그 고통이 엄마의 삶에 의미를 지니는지, 엄마가 그런 고통을 겪는 일과 자신과 전혀 다른, ‘그린과 제인’이라는 타인을 이해하고 만나려는 힘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등.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작가의 이전글 그때, '서평(書評)'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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