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 <파리대왕>에 덧붙이는 어떤 상상
배를 타고 섬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 랠프는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다. 해군들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이들로부터 들은 뒤에 랠프와 다른 아이들을 떼어놓았던 것이다. 랠프는 점심을 먹고 나서 어느 해군 장교와 면담을 진행했다. 섬에서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던 그 장교였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니? 이제 좀 기력이 되돌아오는 것 같구나.”
“네 감사해요”
“우리는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실들을 알고 있어야해. 너희들은 섬에서 너희들 자신이 몇 명 있는지 모른다고 했었지? 결국 다른 아이들이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섬 전체를 수색했다. 사람을 남기고 떠나면 안 되기 때문이지”
“누가 더 있었나요?”
“응,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불에 탄 시체가 있었어 어린 꼬마처럼 보였지, 그리고 죽은 멧돼지로 보이는 짐승의 사체들을 확인했고…”
랠프는 섬에서 첫 회의를 할 때 얼굴에 반점이 있었던, 사라진 꼬마 아이를 몰래 떠올렸다.
“…그런데 어떤 기록들도 있었다. 사이먼이라는 아이를 알고 있니?”
랠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죽은 아이들 중 한 명이었어요.”
“그 아이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숲 속 작은 공터에서 발견되었어. 나무껍질 뒷면과 옷의 일부로 보이는 천 조각에 타고 남은 숯으로 적어놓은 기록들인데, 거기에 네 이름이 꽤 등장하더구나. 할 수 있다면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사실인지 확인해줄 수 있니?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보고서를 쓰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나무껍질과 천 조각들 앞에서 랠프의 입이 바싹 말랐다.
거기에는 사이먼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섬을 스케치한 그림도 있었다. 사이먼의 이름이 ‘닐’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닐 사이먼(Neil Simon)이 기록하다.’
나무껍질에는 숫자가 남아있는 기록들도 있었고, 숫자가 없는 기록들도 있었다.
"1. 1일차-랠프와의 만남
새로운 대장을 만났다. 잭 메리듀를 제치고 랠프가 대장이 되었다. 그는 큰 덩치에 소라를 잘 불었다. 소라 껍질을 직접 부는 것이 신기했다. 설명하기엔 어렵지만, 잭보다 더 좋은 대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잭과는 달리—잭은 어른을 찾아 나설 뿐이었다!—대장으로 선출되자마자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 섬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탐험대원으로 나를 지명했다. 아까 내가 쓰러지는 것을 봤을텐데, 랠프는 왜 나를 탐험대원으로 지목했을까?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신이 나서 탐험을 하면서 좋은 의견을 제안했다. 나무껍질에 지도를 그리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모두들 탐험 중이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나 혼자서라도 이 곳의 지도를 남기고 이 후의 일들을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2. 2일차-오두막 집짓기
회의에서는 잔뜩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을 해도 실제로 일을 할 때에는 다들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러 뿔뿔이 흩어진다. 아무도 랠프를 도와주지 않아서 나라도 끝까지 옆에서 도왔다. 하루에 몇 번씩 어지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짐승 이야기가 나돈다. 랠프는 대장 역할을 힘들어했다.”
“3. 4일차- 구조되지 못한 날
잭의 무리들이 봉화를 지키지 않고 사냥을 나갔다. 수평선 위로 섬을 지나치는 배가 있었지만 봉화가 꺼져버린 바람에 연기를 피울 수 없었다. 우리는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노래를 부르며 멧돼지 사냥을 하고 오는 잭 무리들에 대해 랠프가 단단히 화가 났다. ‘돼지’도 마음이 무너져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슬퍼하지 말자. 배는 언젠가 또 지나가겠지. 이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대장인 랠프가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랠프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두고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문장에서, 랠프는 울컥 눈물이 났다.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짐승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 있다. 언젠가 랠프와 오두막을 짓다가 잭이 우리에게 지나가듯 남긴 이야기가 생각난다. 숲속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 있을 때, 사실 자신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이 든다고. 그렇다. 사실 잭은 자기자신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어제 밤에는 쌍둥이 형제가 산봉우리에서 봉화를 지키다가 한 밤 중에 무언가를 보고 겁에 질려서 해변으로 뛰어 내려온 일이 있었다. 결국 모두 산으로 올라 짐승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정말 그런 짐승이 있을까?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고 날 수 있는데, 쌍둥이의 달리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짐승이? 간밤에 숲 속에 무엇인가를 봤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걸 본 게 아닐까, 그러면 달리 무서워 할 필요가 없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만의 장소가 알려지는 것이 싫지만, 아이들이 쓸데없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걸 바라진 않는다. 용기 내어 밤중에 숲속을 걸은 것은 나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놀림만 받았다. … 짐승은 우리들 자신이다. 숲 속에 있으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사냥부대를 구경할 수 있다. 성가대였던 그 친구들의 옛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떻게 지금처럼 저렇게 하고 다닐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 저들이 짐승처럼 보인다.”
“‘돼지’가 잭의 무리가 사냥해온 멧돼지 고기를 먹고 싶어했다. 잭은 한껏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돼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나의 고기를 돼지에게 전해주었다. 잭은 자기자신을 과시하는 일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내 앞, 땅바닥에 고기 덩어리를 던지고 주워 먹게 했다. 잭으로부터 … 이런 일들을 당하는 건 예전에 성가대 활동을 할 때부터 종종 있어왔다. 자주 당하는 일이라도 늘 처음 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힘들다. 잭의 무리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아프고 힘들다. …… 잭이 사냥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잭도 처음에는 구조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제는 봉화를 지키는 일보다 멧돼지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잭에게 사냥은 무엇일까? 잭은 무엇을 사냥하려고 하는 것일까?”
“랠프가 대장의 일을 힘들어 한다. 랠프의 어려움은 랠프와 맞서있는 잭의 무리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은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지만, 사실은 두려움에 사냥당하고 있다. 랠프는 그런 그들로 인해 지쳐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랠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섬에 갇혀 평생을 지내지 않기 위해서는 랠프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나는 힘들어 하느 랠프에게 다가가서 주문을 외우듯 이야기 했다. ‘랠프! 대장 노릇을 계속해야 돼’, ’넌 네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틀림없이 돌아가게 돼.’이 말을 들은 랠프는 실없이 미소를 지었다.”
랠프는 예전에 자신의 옆에 있던 사이먼이 정신이 나갔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돼지와 사이먼은, 랠프가 잭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닻과 같은 친구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다음 차례의 나무껍질을 읽으면서 랠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헷갈린다. 랠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랠프는 봉화에 대해서, 구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옆에서 보면 잭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장의 역할을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구조되는 것이 목적일까?, 대장의 역할을 유지하는 게 목적일까?”
랠프는 다시금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대장을 맡으려고 했을까? 정말 봉화를 피워올려 구조되는 일만을 생각했을까? 정말 봉화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면, 정말 그렇게, 잭과 함께 고기를 나누어먹고 불을 피워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을까? 정말 구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면, 아이들과 함께 (사실은 사이먼이었던) 그 짐승을 공격했을까? …… 나는 왜 대장을 맡으려고 했을까?’
“‘돼지’는 ‘어른이 있었다면…’, 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처음부터 그랬다. 랠프는 돼지가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돼지는 사실 어른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어른’이라니, 어른이라면 이 상황에서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우리가 어떻게 이 섬으로 떨어지게 되었는지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 어른들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핵전쟁’이라고 했다. 수백 만 명이 죽었다고 했다. 어른 흉내를 낸다고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짐승을 만들어 냈다. 그럼 희망은 어디에 있지? 정말 희망도 우리 안에 있을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
“아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해, 두려움을 사냥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두렵다. 희망은 어디에 있지? 봉화를 꺼뜨리지 않고 구조되는 게 희망일까? 구조되어 이곳을 나가더라도 우리가 있었던 곳은 어른들의 전쟁과 살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결국 구조된다는 것은 더 큰 전쟁터 속으로, 더 큰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랠프는 사이먼이 늘 무언가에 골몰하면서도 뭣 하나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는, 어설픈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아이었다. 멀리보고 많이 생각할수록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법이라서 그럴까? 큰 나무껍질에 사이먼은 방황하듯 한 줄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 그치만 달리 무엇을 해야 하나?……”
랠프는 군인들이 주워온 나무껍질들을 다 읽었다. 이제 낡고 더러운 천조각이 남아있다. 성가대 의복의 뒷감을 찢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는 사이먼이 다른 기록과는 달리 큰 글씨로 휘갈겨져 있었다.
“나는 두려움의 정체를 만나고 왔다. …… 잭의 무리들이 남기고 간 암퇘지의 머리와 창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두려웠다. 짐승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또한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내 마음속에도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곳에도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희망은 없다. …… 결국 이곳에는 잭의 무리가 두려움에 휩싸여 벌이는 사냥이 있고 저곳에는 어른들이 편을 갈라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있을 뿐이다. 크기의 차이일 뿐 다를 것은 없다.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헷갈린다. 도대체 희망은 어떻게 품을 수 있는 거지?……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제는 모르겠다….”
랠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교에게 대충 ‘모든 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나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갑판 위에 올라 난간을 붙잡았다.
순간, 잘못 본 것일까? 갑판의 군인들이 모두 잭의 무리들이 하고 있는 진흙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흰 눈만 내놓은 채,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랠프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