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의 시 같은 나날, 내 플레이리스트에선 동요가 흘러
나는 소젖을 먹고 컸다. 내 동생도 소젖을 먹었다. 젖을 빠는 내 얼굴에 힘줄이 서고 시뻘게지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자 할머니는 아서라, 애 성격 나빠지니 물리지 말라고 하셨다나. 엄마는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했다. 아쉬움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유를 못 먹은 애들은 우리만이 아니었거든. 사촌 언니오빠는 물론이거니와 줄줄이 소시지처럼 다섯을 낳은 작은 아버지네 애들도 모유의 존재를 몰랐다. 엄마 젖을 먹고 큰 사람이 집안에 단 한 사람도 없다니, 그러니까 나는 내 것에 대해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 또한 유전을 따를 텐데 당연하지 않나. 이미 크기로봐서도 합리적인 의심이 충분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기 전 수유는 어찌할 생각이냐는 주변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다. 저는 복직해야 해서요, 직수( *직접 수유)는 아무래도 못하지 않을까요, 저는 모유를 못 먹고 커서 아마 제 아이도 못 먹이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분유 잘 나오잖아요, 제가 먹는 게 워낙 시원찮아서 제 것보다 틀림없이 좋을 거예요, 묻지 않은 대답을 나서서 해가며 진즉에 마음의 준비를 마친 터였다. 부채감 따위는 영영 떠나보낸 후였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출산 준비물 목록에다가도 일찌감치 모유 수유와 관련된 물품에는 죄다 X자를 크게 그어 놓았다. 준비하지 않았단 소리다.
그랬는데 이게 대체 뭔 일이냐고. 내심 기대했지만 임신하고 나서도 드라마틱하게 자라지 않던 가슴은 꼬박 사흘 만에 두 컵 가까이 커졌다. (후에는 더 커졌다.)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잭의 콩나무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났다. 아니 여기서 더 커질 수가 있단 말야 ? 이러다가 터질 것 같아 ! 한결같이 소박했던 가슴이 풍만해지자 소년의 물음표는 느낌표로 갱신해 있었다. 나의 당황스러움을 깊이 나누면서도 기네스 기록을 경신하는 도전자를 볼 때처럼 조금 흥미진진해 했다. 초등학교 사학년 무렵 가슴에 몽우리가 질 때 느꼈던 고통이 옷을 스칠 때마다 되살아났다. 소년은 속옷 끈을 괜히 잡아당기던 짓궂은 아이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워 참을 수가 없었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부끄러움이었을까, 분노였을까, 새로운 브래지어였을까. 그러게 왜 산후조리원은 안 간다고 해서 이 사달을 낸 걸까.
엄마 역시 어쩔 줄을 몰랐다.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왜 괴로워하고, 얼마나 힘들며,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그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공감해줄 이가 하나 없자 고통은 분노로 바뀌어 갔다. 옆에서 일러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기댈 곳이라곤 초록창 하나였다. 쏟아지는 정보의 바닷속에서 건져낸 답은 유축이었다. 짜내서 보관하든지 버리라고. 출구 없는 아득함을 조금은 덜어줄 거라고 얼굴 모르는 언니들이 그랬다.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백일까지 두 시간에 한 번 깨어 밥을 먹는다고 통상적으로 알려졌지만,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모유 맛을 알아버린 내 아이는 한 시간 반마다 울어댔다. 열한 시 반에, 한 시에, 두 시 반에, 네 시에, 다섯 시 반에, 일곱 시에, 그러면 아침이 왔다. 나는 일주일 만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진짜 육아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 무렵의 육아는 오로지 잘 먹이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내 몸은 아이의 식습관에 맞춰 적응해갔다. 아이의 식사 시간이 되면 가슴은 젖을 만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때마침 기가 막히게 일어난 아이가 배고파 울면 나는 젖을 물리고, 스르르 잠들면 온 힘을 다해 남은 젖을 쥐어짰다. 그렇게 짜낸 우유에 날짜와 시간을 부착해 냉장고 한쪽에다가 줄을 세웠다. 그리고 나면 또다시 아이가 일어날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유축기가 있는 삶은 아픔을 덜어주었지만, 피곤을 배가시켰다. 쉴 시간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배가 고팠다. 믿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배고픔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매끼 커다란 대접에 국을 뜨고 밥을 말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아이가 깨어서 언제 식사를 방해받을지 몰랐기 때문에 쫓기듯 식사를 마쳐야 했다. 매일 먹는 미역국이니 맛은 모르겠고,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하여 살기 위한 저작 운동을 하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었다.
엄마는 축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현이가 젖이 많아 힘들어한다는 말을 더했다. 여지없이 어른들은 젖이 잘 도냐고 물어왔기에 아주 잘 돌아서 큰일이라고 하면 너나할 것 없이 크게 기뻐했다. 요즘 애들은 젖도 잘 안 돌고, 먹일 생각도 않는다던데, 이게 다 복이라며 몇 마디는 더 거들었다. 허나 그건 내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남들도 다 이렇게 먹여 키운다는 말로 치환하기엔 아기가 골반 뼈를 으스르며 태어났던 최고조의 순간보다도 나는 더 지옥에 살고 있었다. 등은 굽고, 팔 한쪽은 저릿했으며, 무엇보다 손목이 남아나질 않았다. 유두는 헐었고, 가슴은 유축의 흔적으로 온통 멍이 들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먹이지 않아도 돼, 너 봐라, 얼마나 잘 컸어. 엄마는 말하면서도 내심 먹일 수 있을 때 먹였으면 하는 양가적 감정이 드는 듯 했다. 사실 그건 당사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입안 가득 내 젖을 무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이면 뻔한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공기가 달라지곤 했다. 옅은 숨소리와 꼴딱꼴딱 삼키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 세상에 오직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손가락으로는 눌러지지도 않는 돌덩이 같은 가슴은 아이의 혀가 닿고, 작고 앙증맞은 입술에 담겨야지만 싸한 느낌과 함께 말랑해졌다. 아이의 주문으로만 풀 수 있는 마법에 걸린 나였다. 내가 만든 것으로 네가 목을 축인다니,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탯줄이 없어도 아직 우리가 하나라는 단단한 연대를 느끼며 나는 지나치게 행복했다.
친할머니는 그런 내게 수유를 만류하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솔찬히 먹일 생각 말고 그만해. 힘들어. 초유 먹였으니 됐다. 오래 안 먹여도 돼. 빼싹 골아가지고, 볼품없어 뵈니까 살 뺄 생각 말고 밥이나 잘 챙겨 먹어. 지금 딱 보기에 좋다.”
아이가 좀 오래 자던 오후였나. 할머니는 지쳐 잠든 내게 어서 일어나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손사래 치며 밥 괜찮다고 잠을 더 자고 싶다고 그랬다. 아가 잘 때 자야지, 그래도 엄마가 잘 먹어야 한다면서 내 귓등에 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싫다고-오 !
나는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이불을 휙, 걷어다가 다시금 밥을 먹고 자라고 했다. 밤새 아이에게 시달리고, 오전 내내 우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이성을 잃고 소리 지를 뻔했지만, 꾹 참아냈다. 단전에서부터 가득 모인 끓는 숨을 길고 오래 뱉은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식탁에 앉으니 고춧가루가 걷어진 찬들과 따뜻한 미역국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할머니 밥상이었다. 그러나 눈길도 주지 않고,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국에다 밥을 말아 억지로 욱여넣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부담스러웠지만, 시선을 거두라는 말 대신에 심술을 부렸다. 화가 났다는 걸 꼭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처럼 할머니가 내어놓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왜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토록 쉽게 상처를 주는 걸까. 못되게 구는 내가 싫으면서도 감정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 순간 언제나처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아이의 울음이 고마웠다. 나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두고서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게 눈을 흘겼다. 할머니가 아이를 깨운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랬을까.
할머니는 내 시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분유를 탔다. 그리고는 나를 스쳐지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털썩 자리에 다시 앉아 밥을 먹었다.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져 옅어지던가, 짜지던가 간을 잘 모르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할머니가 나왔을 때 내 국그릇은 비어있었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옮겨 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인제 시작인데 이렇게 요란스러워.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는지, 참.”
할머니의 조용한 혼잣말이 눈치도 없이 문 앞에 조르르 달려와 노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날들이 나도 심히 걱정스러웠다. 나같은 애가 엄마라니, 내가 내 애를 어른을 공경하는 아이로 키운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걸까. 방향이 분명한 혐오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금세 나를 잠식해버렸다. 우는 게 제일 답 없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우는 일 말곤 하고픈 게 없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컴컴한 방이었다. 밖에는 외출했던 부모님이 돌아왔는지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눈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않고, 몇 시쯤 되었는지 물었다. 할머니 이제 가실 거야, 아빠가 모셔다드리고 온대. 낯부끄러워 마주치기 싫었지만, 나는 쭈뼛쭈뼛 어색한 인사를 했다. 가는 와중에도 오직 아가에게만 머물던 눈을 용기 내어 내게로 옮긴 할머니는 밥 잘 챙겨서 먹으라는 지긋지긋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나오지 말어, 뼈 삭어, 난중에 후회 하지 말고 옷이나 더 껴입어.” 맨날 하는 소리들이었다.
할머니가 가시고 오래 지나지 않아 눈치도 없이 가슴은 또 딱딱해졌다. 할머니 품 안에서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던 아이는 금세 자지러지게 울었고, 젖가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곤 꼭지를 찾았다. 젖을 물리자 이내 조용한 식사를 시작했다.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손에 꼬깃꼬깃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가 가져다주래. 얼마나 매만졌는지 할머니 주름처럼 잘게 부서진 봉투에 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할머니의 살갗처럼 주름이 하나하나 살아있어 너무나 거칠었다. 내가 들썩이며 울자 아이도 먹던 입을 떼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니까, 할머니한테 잘해.”
그 말은 엄마가 할머니를 볼 낯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가시는 동안 가현이 저 작은 게 순풍 아이도 낳고, 젖도 물리고, 얼마나 기특하니 하시더라고. 그러는 할머니는 나와 동생 그리고 작은 집 첫째, 둘째, 셋째까지. 제 여식을 다 키운 다음에도 다섯을 더 돌봤다. 내 동생이 스물이 되던 해까지 꼬박 일흔이 넘도록 육아만 하는 생을 산 셈이다. 가늠하기도 어려운 긴 시간 앞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소젖을 먹었지만, 소에게 감사해하지 않는 것은 그 젖을 내 입에다가 고이 넣어준 건 할머니였으므로. 이후로도 스물둘까지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할머니의 젊음과 안락한 노후를 갉아 먹고 자란 나는 지금도 그 사실을 아주 편리하게 잊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