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외국인들이 '훗'이라는 글자가 모자를 쓴 사람 같아서 귀엽다고 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노트에 '훗'이라고 써놓고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챙이 넓은 갓을 쓴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킹덤을 본 외국인들이 갓에 그렇게 환장한다던데. 심지어 이름도 갓이라니 이 얼마나 국제적인가. 갓부심을 살짝 담아 이번엔 '훗' 옆에 '홋'을 써보았다. 둘 다 사람 모양이긴 한데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홋'보다는 '훗'쪽이 비율도 좋아 보이고 성격도 시크할 것 같은 느낌. 표정은 보일 리 없었지만 어쩐지 '훗'하고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글을 처음 배우는 사람의 눈에는 단어나 글자가 색다르게 보인다. 외국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그렇다. 나는 어렸을 때 겹받침 글자에 꽂혔었다. 겹받침 글자들이 좋았던 이유는 글씨 쓰기 연습 노트 때문이었다. 연습 노트에는 칸마다 가로세로로 십자 눈금이 그려져 있었다. 눈금선을 기준으로 글자를 연습해보라는 뜻이데, 그게 나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신경만 쓰였다. 와중에 겹받침 글자들은 칸마다 자음과 모음 하나씩 넣으면 딱 맞아서 예쁘게 쓸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던지. 겹받침은 자주 쓰이지 않아서 찾으면 더 반갑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는 자기 이름에 쓰이는 글자라서, 또 누군가는 자기가 예쁘게 쓸 수 있는 글자라서, 그렇게 만화 캐릭터처럼 글자들을 좋아했다. 글자가 영어로 character이기도 한 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익숙해지면 무뎌진다. 글자를 좋아했던 건 어린 날의 특권처럼 아득하다. 어떤 글을 읽더라도 빨리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느라 바쁘지, 글자 하나, 단어 하나에 감동받을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글자는 무던하게 읽히고, 오타가 있을 때나 다시 눈여겨볼 뿐이다. 그게 사람과 사람의 일처럼 보여서 씁쓸하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렸을 땐 전부 새롭고 놀라웠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일상에 파묻혔다. 무난 무난하게 지나가는 관계 속에 특별한 감동이랄 건 없고, 그러다가 눈에 거슬리는 일에만 마치 오타를 찾아낸 것처럼 화를 낸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어에 무뎌졌다는 건 아니다. 어떤 단어는 여전히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친구와 서로를 부르던 별명, 소중했던 사람의 이름, 애칭 또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 아무 의미가 없는 글자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관계가 있다. 남들은 모르는 농담을 공유하고, 별 뜻 없는 웃음과 울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흔적을 남긴다. 함께 한 공간과 물건, 그리고 언어에는 특별한 자국을 남긴다. 물건들은 버리거나 태우면 사라지지만 언어에 남은 자국은 잊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함께 보낸 시간들이 쌓인 단어는 각별한 무게감을 지니고, 그 무게는 오래 쌓일수록 더욱 무거워진다.
오랜 시간 사용해 온 e-mail 주소라든가, 닉네임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아이디를 사용해 온 사람들의 아이디는 유치한 영단어인 경우가 있다. 다음, 네이버, 라이코스, 구글 같은 포털 사이트들과 지니, 네이트온, 버디버디 같은 포탈들을 지나오며 오랜 세월 사용해 온 아이디에는 자신만 아는 역사가 담겨있다. 이름이라는 게 원래 남이 지어주고 남이 불러주는 것이지만, 닉네임은 조금 특별하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가 사용하는 이름이다. 그런 면에서 조상님들이 자기 호를 지어 부르던 것과 맥락이 통하기도 한다.
익숙한 만큼 무뎌진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무뎌지는 일에 속상해 하기에는 언젠가는 그 속상함마저 무뎌지고 말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 무심하지만, 공평하다. 많은 것들에 무뎌지는 대신 어떤 것에는 특별한 기억을 남기며 시간은 그렇게 지나간다. 오래된 것들에는 거기에만 깃든 추억이 있다. 추억은 새로운 것들이 주는 자극보다 덤덤하지만 더욱 묵직하다. 하루아침에 쌓아 올릴 수 없는 단단한 저변이 있다.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가장 큰 의미가 될 것이다. 너무 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애들에게 놀림받을 걱정도 없는. 세련된 느낌도 있지만, 그렇다고 막 유행을 타지는 않는.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꿈을 꾼다.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거나 뿌듯하지 않을 거라고들 하지만, 아직은 그것 말고는 더 확실하고 오랜 의미를 남겨 줄 일이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