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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Feb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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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를 읽고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용골자리 성운은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같은 모양이다.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성운의 끄트머리가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선처럼 보여서 마치 얕은 바다에 발목을 담근 채 파도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다시 전체를 보면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하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 젖은 모래알에 비친 햇빛의 조각, 부서지는 포말,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물비늘이 가득하다. 우주를 피사체로 보면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들은 생각할수록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주는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깊게 생각할수록 허무해지는 것이었다. 빛나는 하나하나는 전부 태양이다. 어둠 속에는 그보다 많은 지구와 목성, 달과 타이탄이 숨죽이고 있다. 눈을 감고 그 숫자들을 헤아려보면 거듭해서 확대되는 공간감과 끝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광활함에 아찔해진다. 먼 우주에서 지구 쪽을 바라본다면 이런 모습일까? 멀리서 보면 우리 은하도 점처럼 찍힌 숱한 은하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은하 변두리의 특별할 것 없는 항성인 태양과 그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 지구. 여기서 다시 지구의 표면까지 배율을 확대해 보면 몇 백억 개의 생물들이 먼지처럼 바글거리고, 그 가운데 내가 있다. 우주적 규모에서 나는 먼지다. 찰나를 살고 극미세 하게 진동하는 먼지. 누군가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광활한 우주를 생각하면 쓸데없이 열 올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득한 규모는 그렇게 선별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우주를 떠올리면 고민거리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생의 효능감 또한 별 것 아니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등바등 거리며 사는 게 모두 덧없게 느껴졌다. 내게 우주를 직시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가장 놀라운 건 칼 세이건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지식과 그것들을 유려하게 엮어내는 문장력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나는 세상을 향한 그의 태도에 놀랐다. 그는 우주를 직시하면서 허무함에 물들지 않았다. 평생 우주를 연구하면서 지적 호기심이 사그라들지 않았고, 손꼽히는 방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우주를 향해 경탄했다. 원숙한 나이가 되어서도 새로운 것들에 호기심을 잃지 않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생기가 있는데, 그게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동시에 그는 코스모스를 정관 하면서 현실의 문제에 무심해지지 않았다. 현상계 이면에 있을 우주의 질서를 느끼면서 현실적인 관여에 충실했다.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경험이었다. 잘 쓰인 소설은 이야기를 통과하는 동안 나와 다른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듯이, 코스모스를 읽으며 나는 칼 세이건에게 동조화되고 감화되었다. 누군가 내게 "다른 우주인들이 보기에 우리 인간들은 이상한 반목을 하고 있으니 인류 문명을 위해서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뜬구름 잡는 소릴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독특한 음악세계로 사랑받는 락스타가 콘서트에서 고양감에 취해서 하는 인류애 타령이라거나 십자가를 목에 걸치고 광선검을 들고 다니며 스페이스 오페라와 성경의 혼종 세계관을 설파하는 1호선의 SF변사가 하는 소리라고 여겼을 테지만, 그의 얘기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이다. 어쩐지 "바로 여러분"하고 대답해야만 할 것 같은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 그는 이 두꺼운 책을 썼을 것이다. 그가 보았을 때 인류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수소 산업'의 놀라운 최종 산물"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내린 진단이었다. 그에 대한 처방이 "누구도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 수는 없으니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문단에 알차게 담겨있다. 문단 전반부에는 우주의 미물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인류에 대한 경의를, 문단 후반부에는 그런 인류가 앞으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제언을 하고 있다. 뒷부분을 조금 더 규범적으로 덧붙여 옮겨보자면 이렇다.


 우리는 (국가나 종교 같은 가상의 것들로 나뉘어서 싸우지 말고)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인간이 지구를 소유할 수 있는 듯 자연을 파괴하지 말고)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가 우주의 중심인 양 안하무인 하지 말고)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이 학자로서 연구에만 매진했다면 나는 그를 이만큼 좋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류가 잘못되어 가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걸 회의적으로 비판만 하는 관념적인 사람이었거나 우주적인 질서와 아름다움에 비춰 보았을 때 인류가 추하다고 지적하는 고답적인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대중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과학을 소개한다. 저술활동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가 사람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동참을 독려하고, 핵무기 감축에 기여하며, 탐사선 프로젝트를 총지휘하는 등의 다방면의 실천을 하는 모습이 나는 좋았다.


 결국 사람의 일은 사람을 거쳐야 한다. 설령 현상계 이면에 불변의 진리가 있고 그곳에 이르는 인외의 지름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람인 이상, 우리와 같은 겉모습과 내면을 지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므로 사람의 일은 사람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영화 밀양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문제는 사람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책 속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은 대지의 자녀인 동시에 하늘의 자녀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 왔다." 그렇지만 사람은 하늘의 자녀인 동시에 대지의 자녀이기도 하다. 하늘의 기준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대지의 것들이 조악하고 반질서적일지 몰라도, 사람의 일은 결국 사람 사이에서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냉소를 띄지 않는 것, 사람 사이의 문제에 지쳐서 고립을 택하지 않는 것,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향해 보이는 태도에 이름을 붙여본다면 무엇이 적합할까? 인류애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것은 너무 진부하기도 하고, 코스모스를 향한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설명해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한 단어로 요약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결국에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과학"과 "사랑"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가 책에서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나는 그것이 과학자로서 그가 가지는 태도를 요약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본다.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흐린 눈을 하거나 달콤한 거짓으로 자신까지 속이며 편한 세계관을 유지하는 것이 살아가기에 더 편리하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고 남들과는 다르게 별나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그래서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가며 즐겁고 계속해서 시간을 들이는, 그런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마음을 한 가지 알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객체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의 마음은 호기심과 경탄으로 물든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며, 나아가 꼭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마음의 방향이다. 내게서 뻗어 나간 마음이 왜곡되어 다시 내게로 되돌아와 꽂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방사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지치지 않고 세상을 궁금해할 수 있다. 칼 세이건 같은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단지 그가 여러 차례 결혼했으며 코스모스에 스윗한 서문을 남겨서가 아니다. 그가 문제 투성이인 인류를 사랑하고 우리를 있게 한 코스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비추어 보며 내가 느꼈던 허무함의 정체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몇 가지의 생각이 연쇄되었다. 왜 허무한가? 사는 일이 무의미한 것 같기 때문이다. 왜 무의미한가? 어떻게 살아간들 찰나를 살아가는 먼지에 불과한데 아등바등 거린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째서 무의미함은 느끼고 있는가? 진지하게 자문해 본 적 없다면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부와 명예, 세속적 인정과 소속감, 욕망들. 그렇게 도전받아본 적 없는 허술한 토대 위에서 비교로 쌓아 올린 삶의 의미라는 것은 우주라는 월등한 규모에 비춰보았을 때 미미해지기 마련이다. 지상의 귀한 것들은 지상에서나 귀하지 코스모스 전체의 입장에서는 별 볼일 없다. 


 생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정답을 알 수는 없다. 정답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문제의 답을 찾는 과학적인 방법이 있다. 가장 설명력이 높은 지배적인 이론을 채택하고 그것이 반증될 때까지는 그 이론을 따르는 것이다. 짤막한 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성경 말씀에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이 사랑이라 했고, 숱한 성현들의 말씀이 그랬다. 사람들은 생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 사랑하지 못해 후회한다. 살아가며 겪었던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사랑이나 그만큼 가치 있게 대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렇다. 무관심보다 호기심이 냉소보다 경탄이 허무보다 사랑이 삶을 더 의미 있게 한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넘칠 리 없다. 내가 가진 조막만 한 사랑을 긍정하고 더 키워나가려는 다짐을 할 뿐이다. 도시의 불빛은 별빛을 가린다. 인간이 만든 불빛들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별들이 내려보고 있고 저 너머에 끝없이 광활한 공간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이른 새벽에 출근하면서 나는 나름의 별을 볼 수 있다. 아파트에 하나씩 불빛이 켜진다. 시멘트 벽 너머를 상상하면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 새벽같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도가 낮춰진 가로등 사이로 옷깃을 여미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쓰레기 수거차의 헤드라잇 불빛 같은 것들이 길 위에 흩뿌려져 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의 찌든 얼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사람 어치의 마음이 들어있다. 대충 보면 삭막한 도시의 외관에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삶이 복잡하게 교차되어 있다. 그런 마음으로 불빛들을 이으면 별자리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장 가까운 별은 옆사람이다. 한 때 크고 뜨거웠던 별의 조각을 품고 있는 이웃들이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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