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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Nov 02. 2020

엄마가 사준 운동화는 늘 회색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의 기억은 부분 소실된 필름처럼 끊겨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의 울대, 넥타이, 미닫이문, 나무 바닥 복도, 신발장, 비어있던 중앙계단, 손을 잡아주던 어머니의 옷소매. 검은 바탕에 그런 장면들이 드문드문 비췄다가 다시 블랙아웃된다. 기억은 오히려 그 전날이 생생하다. 입학식 전날 밤을 떠올리면 따뜻한 질감의 불빛이 비춘다. 그 빛은 형광등보다는 백열등에 가깝다. 그 날 나는 난생처음 학교 가는 날을 앞두고 걱정과 설렘이 컸다. 챙길 것도 없는 짐을 뒤적거리며 요란을 떨다가, 새 옷과 새 신발을 눈에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서야 겨우 잠들었다. 가방은 품에 안고 잤다. 새로 산 필통과 노트, 학용품도 몽땅 가방에 담아두었다. 밤사이 사라질까 봐서였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출근길에 그 모습을 보곤 기가 차서 한 마디를 하셨다.


"이불도 걷어차고 자는 놈이 가방은 꼭 안고 놓지도 않네. 장남이 물욕이 있어."

"다행히 누군 안 닮았네."


승진은 뒷전에 격무만 골라 맡는 아버지가 답답했던 어머니에게 출근길부터 한 소리를 듣고 가셨다. 그날 나는 어머니가 사주신 어머니 컬렉션을 풀착장하고 학교를 향했다. 모두 새것이라서 마냥 신났다. 패션도 메이커도 모르고, 내가 천 원이 넘는 물건을 직접 고른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처음 물건 투정을 했던 게 중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동네 신발가게에서 사 온 신발도 곧잘 신었는데, 애가 왜 갑자기 메이커 타령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나대로 답답했다. 그땐 모름지기 중학생이면 하얀색 나이키 에어맥스를 꼭 신어야만 했다. 야속한 엄마는 요즘 중학생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면서 내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아무리 핏대를 세워보아도, 마냥 어린애의 철없는 투정으로 받아들였다. 속이 탔다.


"애들 다 나이키야!!"

"나이키고 나발이고 가서 콩나물 좀 사 와."


꾸중이라도 좀 성의껏 내면 안 되나. 나도 이제 중학생인데 콩나물 심부름 같은 건 동생 시키지. 뾰로통해져서 입이 댓 발 나왔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회색 운동화가 괜스레 얄미웠다. 그걸 신으면 이 싸움에서 지는 것만 같아서 아빠 슬리퍼를 신고 심부름을 나섰다. 뒤꿈치 뒤로 슬리퍼 바닥이 절반은 족히 남아 질질 끌렸다.


어머니가 사준 운동화는 늘 회색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와 신발은 무조건 무채색이어야 했으니, 하얀 거나 까맣거나 둘을 적당히 섞었어야 했다. 흰색은 뭐 묻기만 하면 더러워지고, 검은색도 먼지에는 취약했다. 매일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에 들어오는 형제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회색이야 말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신발만이 아니었다. 물건을 고를 때는 항상 실용성이 최우선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며 뭐든 한 사이즈 더 크게 샀고, 옷을 고를 때는 여러 번 빨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짱짱한 지 밑단을 자꾸 당겨보셨다. 무슨 작업복을 고르는 것 같았다. 철없는 시절에는 그게 너무 싫었다. 자본주의는 그때부터 어찌나 합리적이던지 그만큼 실용성을 추구하면 디자인은 꽝이었기 때문이다. 다홍치마는 같은 값 일리가 없었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이키도 맘대로 사고, 핸드폰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이 먹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때마다 휴대폰을 바꾸고, 신발도 용도에 따라 서너 개씩 사둘 수 있는 어른.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소비의 노하우가 늘고, 만족도도 늘었다. 하루의 루틴을 손수 고른 물건들로 채웠다. 일어나서 씻고 먹고 출근과 퇴근, 퇴근 이후까지 하루의 모든 순간은 직접 고르고 산 물건들로 둘러싸여 있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이후로 내 물건을 골라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사주셨던 옷은 정장이었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려면 정장 한 벌은 있어야 한다며 어색해하는 내 손을 잡아끌고 매장에 가서 직접 골라주셨다. 닳고 닳도록 입었던 그 검은색 정장은 이젠 일찍 결혼한 친구들의 결혼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생신이 얼마 전이었다. 생신선물로 뭘 드릴까 고민하다가 소비의 고수가 된 나는 금방 답을 찾았다. 역시 선물은 현금이었다. 실용성이 최우선인 어머니에게 그만큼 적절한 건 없었다. 절차가 너무 간소해져서 선물을 하는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근데 마음은 있었던 걸까? 그럼. 해마다 음력 생신을 때맞춰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금액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생신마다 10만 원씩 더 보낸다고 해도 사시는 동안 기껏 600만 원 차이일 텐데 더 쓸 걸. 아냐. 금액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나중에 더 벌면 더 드리자. 치열하게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뭘 이런 걸 보냈어. 원래 오늘은 엄마 생일도 아니야."

"어머니, 법대로 합시다. 주민등록번호가 생신이시지."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 봐."

"할아버지도 그래. 공무원이라는 양반이 출생신고를 제 때 안 하시고."

"고마워. 잘 쓸게. 근데 너 어렸을 때 엄마한테 생일선물로 손수건 사줬던 거 기억나니?"


손수건이라니. 초등학교 4학년 때 사드린 선물을 아직까지 기억하실 줄은 몰랐다. 손바닥만 한 선물에 어머니가 얼마나 감동했었는지, 그런 어머니를 보고 어린 내가 얼마나 뿌듯했었는지 모른다. 그때의 뿌듯함이 문민정부 시절의 복리로 불어나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머리를 때렸다. 소비의 고수는 무슨...




어머니는 항상 회색 운동화를 사주셨다. 

나는 항상 생신선물을 용돈으로 드린다. 

그 마음이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 인가 하고 공연히 뇌까려본들 아직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나는 과거에 진심을 담아 어머니에게 손수건을 선물했었다. 

요즘엔 고민 없이 용돈을 보낸다. 

사람이 꼭 시간축을 따라서 성장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분절된 자아에 값어치를 메기자면 어지러운 난수표가 되고 말 일이다. 


나이 먹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나잇값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나 어른이 될 수는 없었다. 

실천 없이 반성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역시 다짐뿐이다. 


내년엔 꼭 손수건보다 근사한 선물을 사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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