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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Oct 23. 2020

앞가림은 못하지만 오지랖 좀 부릴 줄 압니다

"이번 주말에는 뭐하니?"

"응, OO 결혼식 있어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동기"

"OO이 알지. 너 근데 설마?"

"네, 맞아요. 또 축가 불러요"


학습능력도 부진하지. 뻔히 한 소리 들을 걸 알면서 또 결혼식에 간다고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그냥 집에서 쉰다고 할 걸. 정 거짓말하는 게 싫었으면 그냥 친구들 만난다고 해도 될 일을.


"오지랖은. 잘하는 짓이다. 남의 결혼식 축가 불러줄 생각하지 말고, 네 결혼이나 해"

"이제 축가 10번은 부른 거 같은데, 그냥 결혼 한 번 한 셈 쳐주면 안 되나? 적립식 쿠폰으루다가"

"어이구 속 터져...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끊어"

"아멘"

"끊어!!"


'아멘'의 뜻은 '그렇게 될 지어다'라고 한다. 아멘. 그렇게 될 지어다. 어머니는 속이 터질 것이고, 전화는 끊길 것이고, 나는 계속 오지랖을 부릴 것이다. 아-멘. 오늘도 어머니의 분통을 터뜨리는 내 오지랖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오지랖이라 함은 대체로 선 없고 담 없던 시절을 살아왔던 어르신들이 더 부릴 법한데, 우리 집안에서는 부계든 모계든 직계존속으로는 오지라퍼를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다들 교회를 다니는데, 나 혼자 안티크라이스트였지. 책하고 안 친한 집안에서 혼자 책벌레였지. 오지랖 하나쯤 더해진다고 해서 딱히 내 혈통이 더 의심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친구들한테는 그래도 인식이 좀 나은 편이었다. 가장 멸칭이래 봤자 이것저것 추천을 많이 해준다고 해서 '추천충' 정도였다. 추천하는 벌레라는 게 좋은 단어는 아니지만, 남초 집단의 위악적인 네이밍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 친구들은 고민이 있을 때, 손수 오지랖을 찾아오기도 했다. 여러 개의 가짓수를 놓고 뭘 선택해야 하느냐. 혹은 고민을 들고 와서 주관식 해답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걔네들의 호의면 충분했다.


대표적인 친구가 L.


L은 연애부터 결혼까지 구석구석 내 오지랖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첫 소개팅에서 어떤 식당을 갈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애프터, 데이트 코스, 기념일 선물까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는 오지랖의 절정을 찍었다. 프러포즈할 때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해주고 싶다기에 의외로 피아노가 쉬운 '다행이다'를 선곡해주었고, 신혼여행지를 어떤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기에 내가 가고 싶었던 크로아티아를 추천해주었다. 결혼식 당일에는 축가를 불러주었는데, 음이탈이 났던 건 아직까지 오지랖 인생에 흠으로 남아있다.  L이 그 이후로도 종종 선택 장애가 올 때, 마땅히 좋은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을 때, 먼저 물어오는 걸 보면 큰 흠은 아닌 것도 같지만.  



오지랖에는 몇 가지 철칙이 있다.


첫째, 나쁜 걸 지적하는 게 아니라 좋은 걸 추천해주기. 기본적으로 내가 오지랖을 부리게 된 이유는 해보고 좋았던 것들을 주변에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시작은 음악 추천이었다. 지금처럼 스트리밍이 갖춰지기 전에는 MP3에 어떤 곡을 넣고 다니는지, CDP에 어떤 CD를 넣고 다니는지가 꽤나 중요했었다. 용량이 한정적이다 보니 듣고 싶은 곡들을 잘 선발했어야 했다. 서로 MP3를 바꿔 듣는 경우도 많았다. 친구의 MP3를 빌려들을 때면, 그 친구의 취향에 이런 곡들이 좋겠다며 몇 곡씩 추천해주었다. 그때 추천을 좋아해 주었던 친구들 사이에서 라디오 DJ라도 된 듯한 느낌이 뿌듯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공부법, 영화 추천, 소개팅, 데이트 코스 등등 그때의 관심사에 따라 오지랖의 장르가 바뀌긴 했지만, 지적이 아니라 추천이라는 톤은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둘째, 반응은 강요하지 않기. 추천 이후에 반응이 정말 궁금하긴 하다. 당장이라도 연락해서 "야, 그거 해봤어? 어땠어? 괜찮았지?" 질문으로 3 연속 콤보를 먹여주고 싶지만, 절대 그래선 안 된다. 강요하면 일단 진실된 리액션이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추천해준 걸 생색내는 모양새가 되기 십상이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그들이 고맙게도 선의를 보여준다.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어느 집단에나 후기를 들려주는 고마운 집단이 존재한다. 경험적으로 5중에 1명꼴로,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꼭 그런 애들이 있다. 세심하고 따뜻한 친구들. 그 친구들이 돌려주는 후기만으로도 추천에 필요한 온기는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셋째, 상대가 필요로 할 때 추천해주기. 이게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상대방이 원치 않을 때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최근에는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만약 한 가지 약만 만들 수 있다면, 불치병을 치료하는 약보다 다이어트 약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만큼. (작년까진 이랬는데, 지금은 코로나 치료제일 듯). 어쨌거나 그만큼 다이어트가 현대인들의 큰 고민이다. 그렇다고 해서 술자리에서 혹은 밥상머리에서 "아, 살 빼야 하는데"하는 말이 모두 다이어트를 해야 하니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약간의 위안일 뿐이다. 그러니까 "살 빼야 하는데"는 식사 전에 죄책감을 날려버리기 위한 식전 기도 같은 셈이다. 거기다가 대고, "지금 드시는 치킨은 고기를 튀긴 거니까 트랜스지방 덩어리고요. 맥주는 텅 빈 칼로리라 그대로 살로 가는 거예요. 둘 다 당장 내려놓으시고 물이나 드세요" 하면 그게 바로 원한을 사는 일이다.


이렇게 세 가지만 지켜도 꽤 괜찮게 오지랖을 떨 수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공들여 오지랖 떨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선의가 선의로 번져나갈 때 느껴지는 쾌감은 모든 걸 감당케 한다.



오지랖이라는 게 애초에 어감이 좋지 않은 말이지만, 요 근래는 특히나 더 미움을 받는 것 같다. 무관심보다 오지랖이 더 나쁘다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그냥 관심 꺼달라는 얘기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면, 부대끼는 게 얼마나 힘들면 다들 그러려나 싶기도 하다. 요즘 뉴스만 보아도 마스크를 어떻게 쓰느냐 가지고도 주먹다짐이 오가는 날 선 세상인데, 그럴 법도 하다. 그래도 오지랖이 아무리 미워도 무관심 아래로는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떤 사람들의 관심 속에는 선의가 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따뜻한 선의가 꼭 있다.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고 하며 흘려보내기에는 소중한 마음들이 있다.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썼다. 타인의 악의와 폭력, 시선과 거짓에 얽혀 자유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되므로 타인은 지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렇다고 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존하는 이상 타인과 교류하고 살아가야 한다. 타고난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지만 벗어날 수는 없는 굴레. 타인이라는 지옥.


그러나 타인은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이 내 자유의지를 억압하지만, 때로는 그 시선으로 내가 나아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악의와 폭력만큼 선의와 위로가 흩뿌려져 있다. 진실은 언제나 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에 있다. 어차피 타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형편에 서로 관심 끄고 살기엔 살 날이 많고 삶은 권태롭다. 회수율도 얼마 되지 않는 오지랖이지만, 또 누군가에게 용기 내서 오지랖을 부려볼 셈이다. 당장 내일이 친구 결혼식이니 축가부터 진심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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