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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Oct 22. 2020

늦은 밤, 잠깐의 위안

영화 <귀를 기울이면>을 보고,

마침내 퇴근. 두 발을 현관에 들여놓자 툭하고 무거운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단음절보다는 2음절에 가깝게 늘어지는 소리. 투-욱. 벗어던진 건 온종일 바깥에서 부대끼며 둘둘 싸매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들이었다. 예의, 체면, 낡은 유머, 작위적인 리액션, 위선과 위악, 냉소 따위의 것들. 그리고 걔네를 줄줄이 엮고 있는 긴장감까지. 두꺼운 보호복을 아무렇게나 벗은 것처럼 육중한 무게감이 발치에서 퍼진다. 곧 어깨가 가벼워진다. 해방감은 잠시 물성을 지녔다가 소리가 되어 흩어진다. 사라지며 남긴 파문은 발언저리에서 묵직하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긴다. 이번엔 알맹이 있는 진짜 소리가 들린다. 턱. 철컥. 삐빅. 오늘도 하나의 루틴이 끝났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한동안 세상과는 단절이다.


코트를 걸어두고, 마스크를 벗고, 노트북을 켠다. 유튜브 홈 화면은 음악 추천 채널의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요즘 노래를 선곡해주는 영상을 꽤 많이 봤는지 비슷한 결의 썸네일들이 나란히 정돈되어 있다. 밤하늘, 야경, 해 질 녘, 빗방울이 매달린 차양. 그 감성적인 커버들에 하나씩 하나씩 마우스 포인터를 올려본다. 그러자 배경은 가만히 있고 화면의 일부만 소박하게 움직임을 반복한다. 마치 별똥별 사진 같았다. 삼각대를 세워두고 몇십 장씩 연속사진을 찍어서 이어 붙이면, 밤하늘은 가만히 있고 어둠 속에서 별만 뜬금없이 나타나 직선을 긋고 사라지는 그런 사진. 들판은 가만히 있고 구름만 살짝 흔들리는 썸네일, 그 옆에는 창 너머에서 별만 밤새 반짝이고 있었고, 다시 그 옆에서는 그 별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에 비춰 물비늘이 반들거렸다. 그렇게 소박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좋았다. 선택받기 위해서 요란한 포장을 하고 있는 다른 영상들과는 달랐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 中


그중에 하나를 골라 재생한다. '여름밤에 듣기 좋은 세상 시원한 시티팝'. 가을이 사라졌니 어쩌니 하는 겨울의 초입에서 여름밤이라니 뜬금없었지만 썸네일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남녀의 뒷모습, 그 언덕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비추고 있었다. 대여섯 걸음쯤 걷는 구간이 계속 반복되는데 처음과 끝이 잘 들어맞아서 끝도 없이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만 같다. 두 사람의 발길은 평행선이다. 저기 소실점까지 걸어가도 합쳐지지 않을 것처럼 나란히.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마음을 들킬까 봐 곁눈으로 서로의 거리를 재고 있다. 스쳐 지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림자만 늘었다가 줄었다가. 울렁이는 마음도 괜스레 그림자를 따라 기울었다가, 기운 제 마음을 알아채고 놀라서 화들짝 제자리로 돌아왔다가. 그때 바람이 오른쪽에서 불어오면서 샴푸 향이 실려온다. 아찔하게. 


망상 끝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네 번째 곡이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댓글을 읽는데, 영상이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한 장면이란다. 바로 넷플릭스를 켰다.


영화는 소녀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중3 소녀 '시즈쿠'는 소설 읽는 걸 좋아한다. 언젠가는 쓰고도 싶지만, 소설가가 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다가 '세이지'를 만난다. 자신이 보는 책마다 도서카드에 먼저 이름이 적어둔 세이지가 누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그런 그 애가 바이올린 장인의 꿈을 갖고 도전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용기를 낸다. 재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부딪혀보기로 한다. 세이지가 두 달간 바이올린 장인의 곁에서 수습생활을 하는 동안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첫 소설을 쓰는데 몰두한다. 두 달 후 밤을 새워 쓴 초고를 세이지의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고, 할아버지에게서 진심 어린 칭찬과 응원을 받는다. 시즈쿠는 감정에 북받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다음 날 새벽, 시즈쿠는 돌아온 세이지와 재회하고, 두 사람은 뷰가 좋은 언덕에서 일출을 함께 보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한참 여운이 남았다. 서로 순수하게 좋아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삶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지는 중3 커플. 걔네를 보고 있자니 참 마음이 훈훈해지고, 부럽다가, 울화통으로 불길이 번졌다. 나는 대체 저 시기에 뭘 했지? 어떤 꿈이 있었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지? 학창 시절의 나는 그토록 빛나는 시간을 어디에 내다 버렸던 걸까. 나도 중3 시절로 인생 포맷시켜줘. 거기까지 생떼를 쓰고 나니 허무함만 남았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왓차에서 영화를 검색해보는데, 김혜리 기자의 평에 유독 눈길이 박혔다. "첫사랑과 함께 찾아온 삶에 대한 책임감" 허무함은 곧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삶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말이 죽비처럼 내리쳤다. 짧은 문장 어디에도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내게 나무라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된 나는 풋풋한 첫사랑에 열낼 게 아니라, 걔네들의 기특한 책임감을 볼 일이었는데. 중3도 하는 걸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언젠가 "인생은 비가역적이라 아름답다"라고 썼었다. 그때의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여전히 과거를 그리워하고 수시로 후회하면서 문장만 그럴싸하게 썼다. 진실로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면서, 지난 시간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혹은 그저 '비가역적'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문장이 그럴싸해 보여서 거짓 문장을 꾸며 썼다. 아름다움은 나 자신의 비루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 中


시간은 소모품이다. 운동을 피하려고 핑계 대는 무릎만 소모품이 아니고, 치과 갈 때마다 야단맞는 치아만 소모품이 아니고. 마침 영화에서는 그 소모품을 멋들어지게 써온 어른들도 등장한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성적이 100등이나 떨어졌으면서도 뭘 하는지 털어놓지 않는 딸에게 "네가 믿는 대로 살아보렴. 하지만 남달리 사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누구 탓도 할 수 없거든."이라고 말해줄 줄 아는 시즈쿠의 아버지라든가. 시즈쿠의 첫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 "아주 좋았어. 거칠고 덜 다듬어진 원석을 보게 되어 기뻤단다. 넌 멋진 애야"라고 말해주는 세이지의 할아버지라든가. 


예전에는 소설을 보고나면 가장 빛나는 문장들에 꽂혔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하나의 문장이 남는 경우도 허다했다. 문장에 담긴 뜻보다는 뜻을 몰라도 일단 멋있어 보이는 문장들을 외우고 다녔더랬다. 요즘은 그런 문장들을 빛나게 해주는 힘을 뺀 문장들에게 눈길이 간다. 노래를 들어도 싸비(후렴구)가 아니라 벌스가 좋은 곡들에 마음이 간다. 비범함을 지탱하는 평범함을 자주 생각한다. 영화 속의 멋진 중3처럼은 될 수 없지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멋진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될 수는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시기의 아이들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따스한 말을 남기는 어른이 될 수는 있다. 시선은 그쪽을 향해야 할 일이다. 인생은 비가역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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