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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Dec 14. 2020

첫우산


워낙 덤벙거려서 온갖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녔지만, 그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잃어버린 물건 1등은 단연 우산이다. 버스, 택시는 물론이고, 친구 집, 학교, 오락실. 비를 피할 수 있는 뚜껑이 덮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우산을 두고 나오곤 했다. 나이에 곱절을 해도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수두룩하게 잃어버린 우산들은 대부분 곧 잊혀졌지만, 와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우산이 하나 있다. 재수생 때 샀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가 그려진 장우산. 그전까지 우산은 가족이 같이 쓰는 물건이었는데, 그 우산을 사고서야 비로소 내 우산이 생긴 게 실감 났다. 내 우산이란 건 잃어버렸을 때 확실하게 알았다. 다른 우산들을 잃어버렸을 때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되었지만, 그 우산을 잃어버렸을 땐 다시 그 우산을 쓰고 다닐 수 없다는 사실에 속상함이 앞섰다. 말하자면 내 첫우산이었다. 



재수학원은 인구밀도가 높은 감옥 같았다. 입시에 실패한 것도 죄라면 죄였고, 그 결과 갇혀있게 되었으니 인과관계의 뼈대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매월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 순으로 이름을 게시했다. 당연히 점수가 높을수록 모범수였다. 벽에 붙는 명단과 모의고사 점수, 배치표 어느 선에 걸린 표준점수. 이런 것들이 재수학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나를 규정해주는 좌표였다. 그 날은 7월 모의고사 점수가 발표됐고, 좌표가 요동쳤다. 모의고사 점수가 1년 전보다 더 낮은 곳까지 곤두박질친 것이었다. 비좁은 교실, 책상 사이마다 위태롭게 쌓인 문제집, 공부에 열중하는 애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머릿속을 죄어왔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어도 멀미가 나는 것 같아서 학원에서 도망쳐나왔다. 정해진 행선지는 없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낯선 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빗방울에 정신을 차렸을 땐 생소한 동네, 이정표가 되어 줄 간판 하나 없는 골목길 위였다. 마른 아스팔트 바닥에 찍히는 빗자국이 굵고 늘어나는 속도는 느긋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급한 대로 근처 문구점을 들어갔다가 그 우산을 발견했다. 무슨 그림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느낌에 끌려 덜컥 집어 들었다. 



활짝 펴고 올려다 본 우산 너머로 빗줄기가 쏟아지는 하늘이 반투명하게 보였다. 마치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가 액자 바깥의 세상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자박자박한 발자국 소리와 하수구로 흘러들어 가는 빗물 소리,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어우러지고, 그림 바깥의 세상에는 비가 오지만 나는 그림 속, 19세기 아를의 어느 카페테라스에서 비를 피하는 것 같았다. 쪽빛의 밤과 치잣빛의 조명으로 둘러쌓인 순간은 그 배색만큼이나 안온했다. 빗길에 멈춰 서서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쏘다니던 중에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그 뒤로 비가 오고 심난한 날이면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하는 생산적인 목표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한 시간쯤 걷다 오면 복잡했던 머릿속도 한 바탕 뒤집었다가 정리한 것처럼 말끔했다. 그 해, 2006년의 여름엔 유난히 많은 비가 쏟아졌다. 우산과 함께 장맛비를 거닐던 그 시간이 불안의 시기를 버티게 했다. 덕분이었을까. 장마가 끝날 무렵에는 점수가 제자리를 찾았다. 언제 슬럼프였냐는 듯이 집중도 잘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우산을 잃어버렸다.



소나기가 잠깐 몰아쳤다가 그친 날이었다. 항상 그런 날이 문제였다. 당장 눈 앞에 비가 올 땐 우산을 꼬박꼬박 챙기지만, 비가 일찍 그치면 방금 전까지 우산 덕분에 비를 피한 건 까맣게 잊는다. 필요라는 게 그만큼 얄팍하다. 수능이 끝나고서야 비슷한 우산을 사려고 찾아다녔다. 물어물어 다시 방문한 문구점을 포함해서 두 달 동안 족히 50여 곳은 들렀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연말연초의 분위기에 휩쓸려 시간은 급하게 지나갔다. 언젠가부터는 멀리 문구점이 보여도 당연히 없겠거니 포기했다. 몇 발짝의 헛걸음도 내키지 않을 만큼 생각이 잦아들 때쯤 대학에 갔다. 신입생으로 처음 맞는 봄은 모든 게 새로워서 눈 닿는 곳마다 정신이 팔렸다. 봄꽃이 순서대로 번갈아 피었다 지고, 그늘 진 자리의 벚나무 아래에도 꽃잎이 분분했다. 곧 5월이었다. 



봄과 여름을 가르는, 환절기의 비가 예고도 없이 왔다. 우산을 펴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강남역 6번 출구 앞길, 빼곡한 사람들 틈에서 마주쳤다. 인파에 휩쓸려 그대로 지나쳤지만 분명 그 우산이었다. 엇갈려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 멈춰 서서 지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쫓아가서 어디서 샀는지 물어볼까 망설이는 중에도 그 우산은 다른 우산들 위로 둥실둥실 멀어지고 있었다. 겨우 우산 하나에 이게 무슨 유난일까. 지금 보니 디자인도 요란스럽던데, 그 땐 왜 그렇게 좋았을까.



그러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좀 예쁜 우산이었을 뿐인데. 다른 우산이나 다를 것도 없는데, 뭐가 애틋했길래 그리 찾아다녔던 걸까. 뭐가 절실했길래 그렇게 마음을 주고 시간을 들였던 걸까. 고작 우산인데. 비가 오면 꼭 그 우산을 챙겨 나가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다시 돌아오는, 이유도 모를 일을 여름 내내 꾸준히도 했다. 특별한 목적도 없었고 뾰족한 답을 주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마음을 쏟았던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애착의 시간들. 사실 그건 좋았다기보다 필요했다. 그 시절의 불안이, 불안을 견디게 했던 애착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것들이 그 땐 필요했다. 어딘가에는 치우쳐야만 했다. 무엇에든 마음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시절이었다.



우산이 지하철 역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더 지체했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했다. 약속 장소는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건물 2층의 술집이었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꽤 북적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어깨를 접고 서서 우산을 정돈했다. 물기를 잘게 털고 잎마다 결을 잡아서 하나씩 접어서 바짝 동여맸다. 단추를 채워놓고 보니 우산에 길이 단정하게 잘 들어서 만족스러웠다.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유난스러웠던 옛 일도 몇 분 남짓한 추억거리가 되고 말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습관은 남아 있었다. 한 시절을 사로잡았던 강렬함이 남긴 자국같은 습관. 그 사소한 흔적들을 매개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어지고 있었다. 계단 옆에 놓인 전신 거울에 옷매무새를 비춰보며 또 어떤 애착이 남겼던 습관들을 되풀이했다. 소맷단을 정돈하고 소란스러운 술집을 향해서 계단을 올랐다. 또 한 번 마음이 치우칠 곳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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