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샌디에이고
※ 알림: 이 글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것에 조금 관심이 있긴 해요. 그렇지만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화장품 회사는 인기가 너무 많기도 하고 들어가기 어려워요.”
“그럼 아예 원하는 게 없는 건 아니네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아요. 꼭 화장품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한다기보다는 화장품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만이라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 봐요.” 부드러운 녹안으로 나를 쳐다보며 에릭이 말했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수긍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훌리오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보다 더. 그래서 무서웠다. 왜 이렇게 신난 거냐고 묻자 훌리오는 또 어깨를 으쓱하며 휘파람만 불어댔다. 훌리오의 꿈은 뭔지 궁금해졌다.
“네 꿈은 뭐야?” 스페인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훌리오라는 것을 알기에 대학 졸업 후 나처럼 혹시 낯선 땅에서 방황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공무원이 될 거야.” 훌리오가 마치 노래를 부르듯 대답했다.
“아, 그래? 어떤 부서?” 흥미로워진 내가 더 캐물었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수의학을 전공했어. 그렇다고 수의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동식물 검역관이 될 거야. 돈도 많이 주고 일은 조금 하는데 정년까지 보장되는 아주 멋있는 직업이지. 그렇지만 그 직업을 얻으려면 적어도 4, 5년은 시험공부를 해야 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는 시간이야 지금은.”
“와! 그렇게 멋있는 직업이 있다고?” 내가 원하는 것도 차라리 시험을 보고 통과하면 되는 종류의 것이었으면 더 나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훌리오처럼 집안의 지원을 받아 몇 년 동안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나는 마냥 마음이 편한 게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1년 끝에 나는 바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직 고통이 조금 유예된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생각 없어 보이던 훌리오에게조차 탄탄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더 압박감이 느껴졌고 어느 정도 당황을 하게 되었다. 내 인턴십 자리를 대신 찾아봐주는 NGO 단체 직원에게 상담을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찾아야 했고, 어쩌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쯤 어학당에 다니면서 나에겐 부끄러운 버릇이 생겼다. 수업 도중에 허락을 받고 교실 밖으로 잠깐 나가는 것이었다. 핑계는 화장실에 간다는 거였지만 나는 화장실에 가지 않고 로비에 있는 음료 자판기를 향해 갔다. 가는 동안 리셉션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이 시야에 들어오지만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음료를 사는 동안 브라이언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난 일부러 보란 듯이 철저히 그를 무시하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냥 그게 기분이 통쾌했던 것 같다.
하루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게임을 하기로 해서 2인 1조로 짝을 지어 밖으로 나가기로 한 날이 왔다. 그때 내 하드렌즈에 먼지가 꼈고 나는 아프고 시린 눈을 부여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화장실에 갔다. 그때 복도에서 브라이언과 마주쳤다. 브라이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화장실에 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화장실에서 오른쪽 눈의 렌즈를 빼자 고통은 바로 사라졌고, 나는 한쪽 눈이 흐린 채로 시내를 돌아다니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날처럼 미드를 연속으로 시청하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브라이언이었다.
‘괜찮아요? 아까 우는 것 봤어요.’
‘그냥,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오늘 뭐해요?’
‘집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쉬려고요.’ 미드를 본다고 이야기하는 게 뭔가 한가해 보여 나는 일부러 책을 본다고 대답했다.
10분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이대로 대화가 끝난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싱거운 인간’하고 욕을 하는데 또 진동이 울렸다.
‘왜 나 무시하는 거예요?’ 문자가 날카롭게 박혔다.
‘왜냐뇨.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 봐요. 충분히 모른 척할만한 관계 아닌가요?’ 나는 흥분해서 쏘아붙였다.
‘그래서 뭐요? 그렇다고 내가 이런 대우를 참아야 하나요? 앞으로는 서로 인사하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를 더 도발했다. ‘싫다면요?’
5분…6분이 지나고 7분이 될 무렵 답장이 왔다.
‘지금 나와요. 나랑 술 한 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