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샌디에이고
※ 알림: 이 글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
‘그래요, 1시간 뒤 펄스 알람에서 봐요.’ 잠깐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했다.
나는 이미 검은 뿔테 안경으로 갈아끼고 편한 파자마를 입고 있었으므로 나가려면 다시 꾸며야 했다. 한국에서 폐업하는 옷가게 공장에 가서 만원에 저렴하게 원피스들을 사왔었는데 우리나라보다 옷값이 비싼 미국에서 유용하게 돌려 입고 있었다. 양팔은 하얀 레이스로 되어있고 몸통과 밑단은 남색으로 된 원피스를 입었다. 잘록한 허리의 체형이 강조되어 내가 좋아하는 원피스였다. 복도의 카펫을 즈려밟는 부드러운 촉감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를 나섰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훈훈한 날씨였던 샌디에이고에서는 야자수에 꼬마 전등을 걸어 나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저 멀리 밤톨 같은 브라이언의 모습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그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표정을 굳혔다.
“괜찮아요? 많이 울었어요?” 정말 걱정을 하긴 한 듯 나를 보자마자 브라이언이 물었다.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약간 어색한 듯 서로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했다. 따뜻한 샌디에이고의 거리와 다르게 우리의 사이는 미네소타처럼 차가웠다.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자주 보던 바텐더가 늘 혼자 오던 나의 옆에 동행한 브라이언을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으며 쳐다봤다.
“여긴 원래 아는 곳이에요?” 브라이언이 메뉴판을 살짝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시선은 메뉴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가끔 왔어요.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여기 파인애플 사이다에 중독됐거든요.”
“하하, 역시 과일주를 좋아하네요?” 브라이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네, 브라이언은 과일주가 싫다고 했죠?”
“과일주는 남자답지 않아요, 예지. 난 남자고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결국 또 스컬핀 IPA를 주문했다. 쓰기만 하고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술이었다. 사람의 취향이란 건 참으로 다양하고 또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잊고 있었다니…” 술잔을 부딪힌 뒤 브라이언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원래부터 아름다웠어요.” 내가 발끈하며 이야기했다.
“왜 나는 당신을 보낸 걸까요?” 브라이언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했다. 이 사람이 취한 건가, 무슨 수작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브라이언, 내가 다시 기억을 상기시켜 줄게요.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당신이 내 남자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였죠.” 내 목소리가 조금 커지고 조금 떨렸다. 사이다 잔을 쥔 손가락도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맞아요. 하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잖아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우리 예지가 샌디에이고를 떠나기 전까지만 사귀어요. 그리고 예지가 떠나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예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브라이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눈빛은 아직도 슬퍼보였다.
“브라이언, 그럴 거면 아예 다시 시작하지 말아요. 계속해서 우리의 연인 관계를 키워나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완전히 끝내요.”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갈피를 못 잡고 맴돌았다. 나는 브라이언이 끝까지 비겁한 겁쟁이처럼 군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상처받은 생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꼴보기 싫었다. 브라이언은 나에게 이기적인 제안을 하면서도 매달렸다. 이야기가 네다섯번 도돌이표를 그리자 우리 둘은 모두 지친 기색이 되었다. 슬슬 집에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생겼고 우리는 짐을 챙겨 머뭇거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예지. 나는 예지를 좋아해요.” 옆에서 걷던 브라이언이 주저하듯 말했다.
“그럼 우리 이제 공식적인 관계가 되는 건가요? 내가 떠난 이후까지요.” 내가 쏘아붙였다.
“그건 자신 없어요.”
“네, 잘 알겠어요. 브라이언의 뜻을 존중하고 나도 내 갈 길을 찾아 나설게요.” 나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쥐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한국이었으면 패딩을 입을 날짜인데 여기서는 코트로 커버가 되네.’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브라이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좋아요. 내 여자친구가 되어줘요. 예지가 우는 걸 보는 게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요. 내가 다시 웃게 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