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샌디에이고
※ 알림: 이 글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 눈을 채 뜨기 전부터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브라이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으으…” 짧게 한숨을 쉬며 겨우 이층침대에서 일어나면 방에는 나 혼자였다. 또 늦잠이었다. 따뜻한 날씨였지만 뜨거운 샤워를 하고 날개뼈까지 오는 긴 머리를 대충 말렸다. 머리에선 아직도 물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제대로 털지도 않고 급하게 어학원으로 뛰었다. 플랫슈즈를 신어서 그런지 발바닥과 복숭아뼈가 동시에 아파오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어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미 나와 일을 시작한 브라이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나쳐 왼쪽에 있는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내 뒷모습을 브라이언이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교실에 들어가서는 괜히 훌리오에게 수업 끝나고 한잔 하자며 친근한 척을 했다.
훌리오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 오늘 에릭이라는 남자 집에 놀러가기로 했어. 같이 갈래?”
“뭐야? 어디서 알게 된 남자인데?” 나는 궁금한 척 물었다.
“술집에 갔다가 만난 멕시코 계 미국인인데 내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하니까 관심을 보이더라고. 둘이 스페인어로 한참을 대화했어.”
“뭐야, 난 스페인어 못 한단 말이야.”
“괜찮아. 영어로 대화하면 되지.” 훌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개강을 한 지 2개월이 됐지만 훌리오의 스페인어 억양은 어째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함께 라 호야로 향했다. 서퍼들이 좋아하는 파도가 넘실대기로 유명한 해변가였다. 모래사장 근처에는 멕시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술집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알록달록한 작은 조명들과 라틴 음악 소리가 풍기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좀 월세가 비쌀 것 같은데 아닌가?” 난 오지랖을 부리며 훌리오에게 말했다.
“글쎄? 그래도 가스램프 쿼터보다는 싸지 않을까?” 훌리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에릭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옆에서 같이 걸으며 바닷바람을 맞으니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느새 에릭의 집에 도착했다. 새하얀 2층집이었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보던 으리으리한 저택은 아니었고 목재로 지어진 듯한 사용감이 꽤 있어 보이는 소담한 2층집이었다. 에릭은 우리를 보더니 빠르고 현란한 손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키가 매우 작은 남자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미국식 인사가 끝나자 에릭은 자신의 하우스메이트라며 한 여자를 소개했다.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나는 주눅이 들었다.
훌리오가 속닥대며 나를 놀렸다. “저 여자 마치 여신 같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너는 아기 돼지같아.”
누구의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은 골든 리트리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고 집에 아직 오지 않은 하우스메이트가 한 두명 더 있었다. 에릭이 훌리오에게 스페인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고 훌리오는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로 대화했다. 여신 같은 여자도 라티나인듯 했고 그 속에서 나는 뭔가 소외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라티노 혼혈이면서도 스페인어를 하지 못 하는 브라이언이 샌디에이고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밤톨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다 샌디에이고까지 오게 됐어요?” 에릭이 나에게 물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오게 됐어요. 대학을 졸업했는데 진로를 찾지 못 했거든요. 에릭은 어떤 일을 해요?”
“나는 의료용 마리화나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마리화나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내가 구해다 줄 수 있으니까.” 에릭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한국인은 마리화나를 피울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법이 아주 엄격해서요. 전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요. 훌리오 너는 어때?” 내가 괜히 말을 돌렸다.
“나는 다 좋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담배든 마리화나든 뭘 피우는 걸 개인적으로 즐기지 않아, 난.” 훌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에릭은 어딘가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매너 있는 태도를 잃지는 않았다. 계속 보다 보니 심슨 가족에 나오는 밀하우스와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에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도 대학생 때 방황을 많이 했죠. 전공을 두 번이나 바꿨어요. 라스베가스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콜로라도로 편입을 했어요. 결국에는 조경학으로 졸업을 했어요. 마리화나를 재배하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에릭의 갈색 눈이 빛났다.
“마리화나 때문에 전공을 정할 정도라니, 대단한 열정이네요!” 나는 그게 옳은 방향인지에는 상관없이 열정 자체를 높게 사며 대답했다.
“예지는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나요?” 안경 뒤로 눈빛을 빛애며 에릭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