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있다는 것이다. 에어컨을 설치할 때, 인터넷을 연결할 때, 커튼을 달 때, 가구를 배치할 때, 아파트에서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어느 집이든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 기사님들도 큰 의문 없이 "다들 이렇게 하세요" 하고 뚝딱뚝딱 일을 처리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해볼 만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이것이 우리에게 셀프 인테리어를 도전하게 만든다.그래서 규격이 더 중요해진다.오래된 아파트는 이러한 규격 또한 오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맞는 것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그 사이에 리모델링을 집집마다 약간씩 다르게 한다면, 또 내 앞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었다면, 변수는 더 커진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던 차에, 약간은 충동적으로3D 프린터를 구매했다. 3D 프린터는 규격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110V 전기가 흐른다.
220V와 110V 콘센트가 공존한다. 작동 여부는 확인 불가.
요즘은 집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건조기 넣을 자리까지도 고려하지만, 30년 전에 이 집을 지을 땐 인터넷이나 에어컨, 세탁기, 큰 냉장고 같은 것들은 보편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집에는 어떻게든 요즘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기 위한 입주자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베란다에 세탁기를 설치하기 위해 전기는 벽에 뚫린 구멍으로 끌어왔고, 수도는 화장실에서 끌어왔다. 벽의 구멍은 에어컨을 설치할 때 뚫은것으로 추정.
베란다부터 화장실까지 집안을 가로지르는 호스가 존재한다. 화장실에는 세탁기를 넣기 위해 문틀을 잘라냈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거실을 가로지르는 호스는 집을 볼 때 벽면 전체가 가구에 가려져 있어서 못 봤던 부분이었는데, 이사 온 직후엔 다소 충격적이었으나 가구가 들어오고 이런저런 불편함이 해소되면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됐다. 지금은 침대와 책상 때문에 그럭저럭 거슬리지는 않는다.
철물점에선 너트를팔지 않는다.
시작은 화장실 조명이었다. 보통은 조명을 모두 제거하고 벽에 칼블럭을 박아서 밖에서 안쪽으로 나사못을 박는 경우가 많지만, 타일은 타공을 잘못하면 금이 갈 수도 있기에 최대한 타공 없이 이전에 사용되던 구조물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나비너트 출력 시간은 2개에 약 5분 소요.
기존에 설치되어있던 브래킷을 떼어서 제대로 펴고 재설치 한 뒤, 벽에 칼블럭을 박는 대신 볼트를 반대방향으로 빼서 너트로 조여 조명을 고정했다. 여기 설치할 너트를 찾아 철물점도 가보고 다이소도 가봤지만, 볼트와 너트는 아예 볼트 가게에 가야 한다는 철물점 사장님의 조언에 고민하다가 규격에 맞는 나비너트를 3D 프린터로 출력해 보았다. 약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트 자체의 품질은 공장에서 만든 것만 못하겠지만 조명은 잘 고정되었다.
여기에 재미가 들려서, 한동안은 자기 전에 도면을 찾아놨다가 출근할 때 프린터를 눌러놓고 다녀와서 출력물을 확인하고 어딘가 뜯어고치는 일을 반복하였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애매한 부품들도 출력해 보았다. 그래서 몹시 피곤했다.
행거를 설치하고 남은 기다란 봉을 활용하였다. 커튼봉 지지대 출력 시간은 약 4시간 소요.
봉 크기에 맞게 출력한 지지대는 글루건으로 붙여주었다.
전에 행거를 설치할 때 서랍을 넣느라 빼 둔 기다란 봉이 2개 있었는데, 어떻게 활용해볼 수 없을까 하다가 커튼봉으로 활용하였다. 창문 길이보다 짧은 부분과 창틀에 고정하는 브래킷 부분만 창 크기에 맞게 출력해서 설치했다. 베란다 쪽 벽의 합판이 오래되어 들떠있어서 벽에 타공 하기도 그렇고 새시의 깊이가 좁아서 '못없이고리'도 설치할 수가 없었는데, 글루건으로 고정하니 붙이는 것도 떼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아 졌다.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28만 원 상당의 제품을 활용했고, 이전에 3D 프린터 교육을 들은 적이 있어서 더 수월하게 접근하긴 했지만 조작법은 크게 어렵지 않다. 크게 3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
1. 도면 구하기 2. Slicing: 도면을 실제 프린터에서 출력할 수 있게 변환 3. 3D 프린터로 출력
도면은 CAD나 Sketchup 혹은 Tinkercad 같은 사이트에서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서 공개해놓은 도면이 많다. Thingiverse라는 사이트가 가장 유명한데, 위에서 뽑은 출력물도 거의 여기서 구했다. 대부분 이걸 그대로 활용하거나 필요에 맞게 약간만 수정해서 사용했다.
3D 모델을 Slicing하면 gcode파일로 변환된다. 이 파일을 3D프린터로 전송해서 출력한다.
3D 모델을 프린터로 출력하려면 프린터의 규모, 규격, 필라멘트, 도면 등 출력 환경에 따라서 출력 과정을 시뮬레이션한 뒤 3D 프린터용 코드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을 Slicing이라고 하는데, 무료로 배포되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다. 여기서는 CURA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실제 출력도무료로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필라멘트를 다양하게 하면 질감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 볼 수도 있는데, 소재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가격은 보통 1kg 당 2만 원 이내. (1kg면 초보에겐 엄청 많은 양이다. 1년은 쓸 듯.)
배보다 배꼽이 큰 걸 수도 있다.
작은 3D 프린터로 퀄리티나 활용도 면에서 완전히 모든 기성 제품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가정용 잉크젯 프린터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어렵듯이, 3D 프린터는 애초에 제품 양산의 용도는 아니다. 그러나 상상하는 거의 모든 것을 만들 수는 있다. 나에게는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이 한 가지 더 생겼고, 몇백 원짜리 나사 하나 사려고 배송비를 2500원씩 부담해가면서 택배 상자를 정리하는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도면을 찾고, 없으면 그리고, 프린터를 관리하고 하는 일들이 어쩐지 좀 귀찮은 것도 사실이다. 힘들고 지치면 셀프 인테리어도 언제 방치될지 모르겠다. 언제 팔아치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집은 정리하는 중이고, 뜯어고칠 구석이 많고, 당분간은 3D 프린터도 열심히 돌아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