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가 묵은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서 제임스타운(Jamestown)은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윌리엄스버그는 1699년부터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역할을 제임스타운으로부터 넘겨받은 곳이다.
제임스타운 거주지(Jamestown Settlement)라는 곳을 찾아갔더니, 이곳은 원래 식민지가 건설된 장소가 아니라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며, 원래 식민지터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어제 로아노크섬에서도 똑 같은 경험을 했었는데. 도로에 있는 안내판을 따라 가다보면 방문객들은 원유적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재현된 마을로 먼저 안내된다. 돈의 힘이라고나 할까? 표지판만으로는 둘 사이의 구분이 힘들게 되어 있다.
원래의 식민지터는 역사적 제임스타운(Historic Jamestown)이라는 명칭으로 되어있고, 국립공원서비스에서 관리하고 있다.
로아노크와 마찬가지로 방문객센터에는 제임스타운의 역사 및 발굴된 유적에 대한 소개와 영화가 준비되어 있고, 가이드투어가 진행된다. 차이가 있다면 그 규모나 방문객 숫자가 이곳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2년 만에 사라져버린 로아노크와 달리, 제임스타운은 오늘의 미국이 완성되기까지 지속되고 발전되어 온 곳이기에 이곳의 역사는 곧 미국의 역사가 되고, 그러다 보니 다루어지는 내용도 방대하다.
유적지 이곳 저곳이 어수선하다. 제임스타운은 1619년에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식민지 의회를 구성하는데, 선거를 통한 의회 구성은 서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 400주년을 기념하여 트럼프 대통령이 어제 제임스타운을 방문했단다. 우리 일정이 하루 빨랐더라면 그를 볼 수 있었을까? 아님, 아예 제임스타운 입성도 어려웠을려나?
어쨌건, 그는 원래의 유적지가 아닌 복원된 마을 Jamestown Settlement을 방문하고 연설했다는데, 좀 의아하다. 제임스타운 의회는 원래 유적지인 Historic Jamestown에 있던 당시 교회에서 최초로 소집되었었다. 이곳에서는 대통령 연설이 아닌 다른 기념행사가 열렸단다.
12시에 시작한 가이드 투어는 1시 40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우리의 가이드 테일러는 5년차라고 하는데, 100분이라는 시간동안 엄청 빠른 말로 제임스타운의 탄생 및 초기의 위기상황과 관련한 얘기들을 상세하게 훑어간다. 그럼에도 100분 동안 1607년부터 1620년대까지 밖에 다루지 못했다. 그만큼 할 얘기가 많은 것이다. 이제 다시 나의 차례이다. 이 방대한 내용을 간단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내야 한다.
가이드는 우선, 제임스타운이 영국이 건설한 가장 오래된 미국 식민지로써 현재의 미국을 있게 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한 플리머스(Plymouth)가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아이러니에 대해 얘기한다. 자신도 메이플라워호와 청교도의 도착을 미국의 시작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그 동안 미국의 학술과 교육을 주도했던 곳이 뉴잉글랜드 지방이었던 것이 그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제임스타운은 설립된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에 직면하고 이로 인한 각종 흑역사가 넘친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다. 이에 비해, 숭고한 목적과 경건한 삶 그리고 추수감사절에 원주민들과 함께 하고 나누는 풍습 등을 전해주는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은 자랑스러워할만한 컨텐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제임스타운보다는 13년이나 늦었지만 메이플라워호와 청교도들을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로아노크 식민지 건설을 주도했던 월터랄리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이 관계가 악화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여왕의 시녀 하나를 임신시키고 결국 몰래 결혼식을 올려버린 것이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여왕은 대노하여 그를 런던탑에 가두어버린다. 이후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임인 제임스왕에 의해 역모죄로 처형되고 만다.
하지만, 영국의 신대륙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특이한 방식으로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식민지 건설이 추진된 것이다. 주요 상인들이 자금을 투자하고 국왕의 승인을 받아 설립된 버지니아컴퍼니(Virginia Company)는 20년 전에 월터랄리경이 봐 두었던 체사피크베이에 식민지를 건설할 개척단을 1606년에 출항시킨다.
버지니아컴퍼니는 105명의 개척단에게 봉해져 있는 두 개의 문서를 전달하고, 신대륙에 도착하면 열어보도록 했다. 모진 고생 끝에 1607년에 체사피크베이에 도착한 개척단이 열어 본 첫 번째 문서는 이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내용은 식민지를 이끌어 갈 지도부 구성에 대한 것이었다.
7명의 지도부 명단이 있었는데, 이 중 6명은 누구나가 예상했던 대로 귀족 계급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은 놀랍게도 존 스미스(John Smith)라는 사람으로,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 여러 국가를 전전하며 용병으로 전투 경험을 쌓아왔던 인물이었다. 해외에서의 경험이 많았던 그는,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오는 항해 도중 귀족들의 의사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반란죄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수갑에 채워져 항해했던 전력도 있었다. 이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은 후에 제임스타운 식민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 다른 문서 하나는 식민지 건설 절차에 대한 매뉴얼이었다. 당시 미대륙은 스페인이 영유권을 선포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개발할 식민지 위치는 바다에서 스페인군의 눈에 쉽게 띄지 않도록 강 상류 쪽으로 거슬러 들어간 곳이면서,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정착하지 않고 있는 땅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게 제임스타운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바다로부터 30마일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원주민들의 마을이 없었다. 원주민들은 이곳을 사냥터로만 이용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리고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방어용 요새를 우선 건설하고, 내륙 쪽으로 탐사를 진행한다.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은 주식회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사의 투자사업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당시 버지니아컴퍼니가 투자수익을 올리기 위해 기대하는 가장 큰 아이템은 역시 금과 같은 광물자원이었다. 초기 개척단 105명은 전원 남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이들의 목적이 영구정착이 아니라 자원확보를 위한 기지건설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개척단 중에는 농사전문가도 있어서 이들은 영국서 가져온 씨앗을 파종했지만,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종시기가 지난 후였고, 또한 이곳 토양환경에 맞지 않아 식량 수확에 실패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이들도 자신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잡다한 물품들을 원주민들의 식량과 교환하며 버티는데, 겨울로 접어들면서 원주민들도 식량 교환에 소극적이 된다. 교환할 잉여식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정착민들과 원주민들간에 갈등이 고조된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문제는, 로아노크 식민지가 상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원주민 집단을 상대해야 했다는 것이다. 제임스타운이 건설된 곳은 강력한 왕이 이끄는 포와탄(Powhatan)연맹의 수도로부터 불과 12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포와탄왕은 결혼 등을 통해 인근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막강한 통치력으로 키워나가서, 제임스타운이 건설될 즈음에는 15,000명 정도의 부족원을 통치하는 강력한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포와탄왕은 100명이 넘는 여인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결혼으로 호족세력을 휘하로 끌어 넣은 왕건을 떠오르게 한다.
존 스미스가 그린 지도에 등장하는 포와탄왕의 모습
미국 북동부의 주요 인디언 세력. 보라색 지역이 포와탄 왕국의 세력권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정착지는 식수가 부족했다. 강물은 바닷물이 역류하여 식수로 사용하기 적합하지 않았고, 정착지 인근의 샘은 탁한 데다가 정착민들이 배출하는 오물 등으로 쉽게 오염되었다. 정착민들 다수가 각종 질병으로 인해 도착한 지 1년 이내 사망하고 마는데 아마도 깨끗한 물의 부족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지 않고 단지 사냥터로만 활용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제임스타운도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이전의 다른 실패한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어떤 차별점이 제임스타운을 생존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궁극적으로 제임스타운의 성격에 주목하고 싶다. 제임스타운은 어떤 특정 개인이나 국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여러 투자자의 돈을 모아 집행된 주식회사의 투자사업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주도하는 식민지 운영방식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제임스타운 이야기는 내일로 이어진다. 디즈니 만화로 갑자기 유명세를 탄 포카혼타스가 등장할 계획이다.
오늘 워싱턴 DC에 입성했다. 우리가 반환점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방학 동안 인턴쉽을 하고 있는 딸을 만났다. 이번 주말부터는 미국 인디언 여행 순례자 No. 3로 합류하게 된다. 여행계획이나 일정 진행에 있어 천군만마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해본다. 주말까지는 이곳과 뉴욕에 머물며 장기간 여행에서 지친 심신을 좀 추스를 계획이다. 그리고 DC에서 인디언 관련 장소들을 좀 찾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