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휴식일이다. 충분히 늦잠을 자고,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을 처리했다. 그 중에는 서점에서 지도를 하나 산 것도 포함된다. 아내가, 우리가 소화한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긴 여정을 한 눈으로 보고 싶어해서다.
여행을 시작한 후 렌터카 주행거리가 이제 5578마일(8977Km)을 돌파했기에, 자동차의 엔진오일이 이대로 괜찮은지 확인하러 워싱턴 공항의 렌터카 회사에 들렀다.
현재 주행거리를 얘기하고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거리를 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더니, 두 가지 옵션을 알려준다. 하나는 이 차를 반환하고 다른 차로 바꿔서 여행을 계속하는 것, 또 하나는 렌터카 회사와 제휴되어 있는 정비소에 들러 오일 교환을 비롯한 기타 점검을 받는 것. 다만, 지금 이곳 지점에는 미니밴이 없는 상황이라 바로 차량교환을 해 줄 수 없단다. 지금 당장 급한 상황은 아니니 추후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한다.
두 달간의 인턴생활을 마치는 딸 아이가 부모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자신이 예약해 둔 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여행 시작한 이래 가장 그럴 듯한 식당에서 멋지고 맛난 식사를 했다. 그런데, 계산서가 나오는 순간, 딸아이가 지갑이 든 백팩을 차에 두고 왔단다. 그래도 왠지 얻어 먹은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다. 뿌듯하다.
오늘은 어제 못다한 제임스타운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식량부족과 이로 야기된 원주민들과의 갈등, 그리고 식수원 부족으로 인한 질병 등으로 제임스타운은 식민지 정착 초기부터 많은 이주민들이 죽어 나갔다. 또한 투자자인 버지니아컴퍼니가 기대하는 귀한 자원의 발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정착지 주민들간의 내분도 끊이지 않아서 원래 1년 임기인 식민지 지도자의 자리가 18개월 동안 세 번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존 스미스(John Smith)가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된다.
지도자로 임명되기 전의 일이다. 존 스미스는 정착지의 조달 책임자 역할을 맡아 강 상류 쪽으로 탐사를 나간다. 인근 원주민들도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이 되자 더 멀리 내륙 쪽 원주민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포와탄왕 앞에 끌려오게 된다. 그 다음에 벌어진 상황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먼저 전설적 버전이다. 원주민들이 그를 처형하기 위해 그의 머리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나무클럽으로 내려치려 할 때에, 포와탄왕이 총애하는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가 그의 머리를 감싸며 아버지에게 눈물로 호소해서 결국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존 스미스 본인이 해당 사건 17년후인 1624년 출간한 자서전에 기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포카혼타스가 존스미스를 구하는 모습의 부조작품 (미국 의회의사당 로툰다홀)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이 장면은 매우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선 포카혼타스의 나이이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는 불과 열 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전설이나 만화에서 그려지는 성숙한 처녀(심지어 만화에서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로맨틱한 상황까지 연출된다)처럼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닌가 싶다. 존 스미스가 해당 사건 바로 다음해에 남겼던 기록에는, 자신이 포와탄왕으로부터 살해 위협이 아니라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드라이한 버전이 사실에 좀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식민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존 스미스가 지도자로 임명되자 제임스타운은 새 국면을 맞이한다.
그의 취임 후 첫 일성이 ‘일하지 않은 자, 밥도 먹지 마라'였다. 전체 주민들을 동원하여 무너진 집들과 울타리를 재건하고, 새로 샘물을 파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원주민 포로들의 도움을 받아 현지 사정에 적합한 농사짓는 법을 배워 나갔고, 버지니아컴퍼니측에 식민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목수, 농부, 대장장이 등 기술자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당시 회사에서는 여전히 자원확보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기에 금속제련사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결과 존 스미스가 지도자로 있던 기간 중에는 사망한 정착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당시 식민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귀족 및 상위계급 출신 인사들의 불만을 샀다. ‘권력과 특권은 출신성분이 아닌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 스미스에 대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던 때에 불행한 사건이 터진다. 강을 따라 여행하던 중 잠이 들었던 존 스미스의 탄약 주머니에 누군가 불을 붙여서 그가 큰 부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영국으로 후송되고 다시는 제임스타운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배후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존 스미스가 없었더라면 제임스타운은 얼마 가지 않아 붕괴되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곳 제임스타운 유적지에도 그의 동상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아직도 귀족이 지배하던 계급사회였던 영국에서 어떻게 존 스미스같은 귀족계급 출신이 아닌 인물을 귀족들이 포함된 조직을 다스리는 위치로 임명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당시 제임스타운 식민지는 사업이었고, 여기에 투자한 회사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사업적 성공을 최우선으로 두고 적임자를 찾아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존 스미스는 식민지의 생존을 위해 매우 강압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일 정도로 주민들을 몰아붙였고, 이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는 지도자였다고 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인기 많은 지도자이기는 힘든 법이다.
존 스미스가 떠나고 제임스타운은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정착민들은 다시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원주민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다. 이 장면에서, 제임스타운 역사를 설명해 주는 가이드는 방문객들에게 질문을 하나 한다. ‘당시 제임스타운의 정착민 수는 대략 500명인데 반해 포와탄왕 휘하에는 1만 5천명의 부족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포와탄왕의 대응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1번 전면적인 섬멸전, 2번 포위 지구전’.
답은 2번이다. 이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은 이러하다. ‘당시 포와탄왕국의 입장에서 제임스타운을 쓸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할 경우 바다 건너로부터 대규모 보복을 받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섬멸보다는 포위를 한 후, 이들이 자발적으로 신대륙을 떠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존 스미스가 제임스타운을 떠난 1609년 가을부터 1610년 여름까지 기간은 대기근의 시대(great starving time)라고 불린다. 당시 먹을 것이 완전히 바닥난 식민지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동물을 잡아 먹었고(말, 개, 고양이, 쥐 등), 가죽 신발이나 옷 깃에 먹인 풀조차 끓여 먹었다고 한다. 가이드가 방문객들의 신발을 보더니, 샌들을 신은 여자들에게 ‘당신들은 먹을게 부족했겠다’라고 농담을 던진다.
당시 기록에는 임신한 아내가 죽은 뒤 이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인 일이 발각된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2012년에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을 분석한 결과, 날카로운 칼로 잘게 잘려있는 패턴으로 추론해 볼 때, 해당 유골이 식용으로 활용된 것으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결론 지어졌다. 이 겨울을 지나는 동안 500명의 정착민의 수는 6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원래는 식민지를 향해 보급품과 추가 정착민을 실은 배가 그 이전에 도착할 예정이었었는데, 큰 폭풍을 만나서 난파위기를 겪게 된다. 이로 인해 서인도 제도에서 한참을 지체한 후 이듬해 5월에서야 제임스타운에 도착한다. 이 보급선이 항해에서 겪었던 엄청난 폭풍의 이야기를 소재로 셰익스피어의 명작 템페스트(Tempest)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보급선은 거의 무너져가는 식민지의 모습에 아연실색하고, 결국 이들은 다 함께 식민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철수하던 이 보급선이 큰 바다로 들어설 때 또 다른 영국 함선을 만난다. 이 배에는 식민지의 새로운 지도자와 추가 보급품이 실려 있었다. 결국 모두 제임스타운으로 되돌아와 재건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서, 제임스타운이 포기될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 버지니아컴퍼니가 여러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아서 벌인 사업을 쉽게 접을 경우, 회사 경영진은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 사회적 비난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는 사업은 지속되어야 했고, 투자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망했다고 소문나면 더 이상 투자자를 끌어올 수 없게 된다.
이 위태로운 사업은 존 스미스로 인해 한 번의 위기를 탈출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또 한 번의 기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또 다른 존(John)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명의 존은 제임스타운을 구해낸 영웅이라는 공통점 외에 둘다 포카혼타스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존의 활약상과 포카혼타스의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제임스타운 세번째 이야기로 넘길까 한다.
그리고 내일은 이곳 워싱턴 DC에서 인디언 관련 장소를 찾아갈 예정이다. 기막힌 곳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