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꼬박 잠 한 숨 못 자고 날아, 드디어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발리 신혼여행에서 산 메모리폼 베개는 제 기능도 뽐내보지 못하고, 비행기 좌석 한편에 찌그러진 채였다. 남편은 10년 만에, 나는 생애 처음으로 가는 호주였다. 워킹홀리데이 막차이다 보니 결혼을 하고, 퇴사 후 출국 준비를 하기까지 3개월밖에 안 걸렸다. 출국 전날이 돼서야 내가 무슨 결정을 해버린 건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행기에서 둘 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좁은 이코노미 좌석만큼이나 타이트한 통장 잔액과 3년짜리 영주권 계획표를 가지고, 우리는 호주로 왔다. 캐리어를 찾아 공항을 나오면서도 잠시 여행을 온 건지, 정말 살아보겠다고 온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니트에 남아 있던 11월 인천의 쌀쌀한 공기는 호주의 40도 폭염에 고스란히 증발해 버렸고, 계절의 간극만큼이나 한국에서의 전날 밤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영주권을 받고 난 지금까지도 6년 전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 공항 앞에서 시티로 가는 택시를 기다릴 게 아니라, 그대로 다시 출국장으로 들어가 한국 가는 비행기 태워 그때의 나를 돌려보내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주에 살면서 성급했던 이민에 대한 결정을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민을 권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 반반이에요.
_<딴짓> 매거진 중에서
호주에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 한국에 사는 아는 동생이 호주 생활에 대해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뉴욕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서울에 돌아와 카페를 하며 딸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었다. 남편이 캔버라 주재원으로 근무 제안을 받았는데, 돈도 좀 모으고 아이 영어공부를 위해 호주에 몇 년 살다 오면 어떨까 고민 중이라 했다.
나는 Domain(호주 집 정보 사이트)에서 집값도 함께 찾아봐주고, 차일드 케어나 교통, 생활 등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줬다. 이야기하다 보니 한국 생활과 비교해서 좋은 점보다 불편하거나 힘든 점들을 더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그녀의 남편이 제안받은 연봉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비영주권자로서 아이 학교를 보내며 세 식구가 호주에서 살아가기에 넉넉해 보이지도 않았다. 동생은 고민 끝에 한국에 남기로 했고 여전히 카페를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남편과 내가 이민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결혼이었다. 그전에는 ‘호주’라는 나라에 관심도 없었고, ‘이민’이란 건 그저 남들 얘기일 뿐이었다. 그러다 결혼을 생각할 때쯤 브리즈번에 살고 계신 예비 형님들로부터 호주 생활에 대해 듣게 됐다. 세 분 모두 호주에서 잘 살아가고 계셨고, 계획대로라면 3년 안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가서 머무를 곳도, 내가 일할 곳도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사는 거 다 똑같겠지 뭐’라는 생각으로 처음 가는 곳에서 하게 될 새로운 경험과 출발에 대해 걱정보다는 설렘이 컸다. 한 번쯤 꿈꿔본 해외 생활이었으니.
하지만, 몇 개월 후 직접 와서 겪어 본 호주 생활들은 실망스럽기만 했고, 선택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생에 이토록 외로운 적이 없었고,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고, 상처 받는 일들을 겪다 보니 호주가 아름답게 보일 리 없었다. 영주비자에 대한 정식 단계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온 지 6개월도 안돼서 나는 이미 호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하던 일을 다시 하며 바쁘게 살고 싶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살아야 할까… 힘들어서, 너무 재미가 없어서, 비자가 계속 안 나와서, 와이프가 돌아가고 싶어 해서 이민을 포기하고 하나둘 한국으로, 자국으로 돌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그 마음이 이해가 됐고, 나 역시도 흔들렸다.
호주에 온 이후 숙제하는 기분으로 영주권만 생각했다. 자꾸 바뀌는 이민 정책 앞에 그저 무사히 승인되고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영주권 여정의 끝을 알 수 없었기에 막막했고, 그래서 더욱 그 시간들을 즐기기 어려웠다. 몸 보다 마음이 훨씬 더 지치고 아팠던 6년. 영주비자가 승인됐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역사상 유래 없던 국정농단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었고, 평창에서 첫 동계올림픽이 열렸고, 친척 어른들이 돌아가셨고, 동생이 결혼해서 두 명의 조카를 만났으며, 양가 부모님의 연세가 칠순이 넘으셨다. 그리고, 영주권을 받자마자 호주에도 코로나가 확산되며 국가 봉쇄가 이뤄졌다.
다시 갖지 못할 30대의 6년. 한국에 있었다면 가장 많이 성과를 내고 실력을 쌓았을 그 시기에 나는 호주에서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사춘기도 이렇게 보낸 것 같진 않은데, 이런 오춘기라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진하게 앓아 보냈다. 익숙하고 사랑하는 것들에서 뚝 떨어져 나온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연약했다. 외유내강 타입이라 믿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살면서 한없이 내유외강인 나를 발견했다. 나의 멘탈은 수없이 자주 깨졌고,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몸이 수시로 아프던 어느 날엔가, 한 정신과 의사이자 유대교 랍비의 바닷가재와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바닷가재가 자랄수록 껍데기는 그들을 점점 조여 온다. 압박을 받는 불편한 상황에서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안전한 바위 밑으로 들어가 자신의 껍질을 버리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바닷가재가 자라면 새 껍데기가 다시 불편해지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바위 밑으로 들어가게 껍데기를 바꾸는 과정을 반복한다.
‘바닷가재가 자랄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그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만약 바닷가재에게 의사가 있었다면, 그들이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의사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먹고 다시 기분이 좋아지면 절대로 자신의 껍데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당신에게 스트레스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당신이 성장할 때가 됐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역경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 Abraham Twerski
나는 나의 스트레스를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은연중에 나는 습관처럼 내 시간과 삶에 자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주고 있었나 보다. 왜? 누구를 위해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 몇 년간의 생활이 내겐 바위 밑에 들어가 껍데기를 바꾸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앓다가 제대로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지나버린 것 같아 아깝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시간이 절대 그냥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때의 눈물과 아픔이 내게는 한 번쯤 필요했던 거였고, 어떤 과거와 집착들로부터 내 마음이 비로소 독립을 할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더 크고 단단한 이 껍데기는 그 눈물과 후회의 동굴에서 만든 성장통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