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한적한 산모퉁이. 지나는 이의 발길을 밝혀주려는 듯 초롱불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면?한마디 인사도 없이 지나치긴 어렵겠죠?
생김새대로 불리는 초롱꽃.
골목길 어귀에도 그런 꽃을 심어놓는 분들이 꼭 계십니다. 담장 밖에 꽃 심는 분들, 하필이면 초롱꽃을 그득히 심는 분들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비춰주려는 따스한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꽃을 만나곤 해요.
밤이라도 대낮 같이 밝은 요즘이지만, 가로등 불빛아래 초롱초롱 모여 있는 꽃들은 주인의 그런 따스함이 담긴 '마음의 초롱불'이 아닐까 싶어 그 곁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초롱이 무언지 알고 가도록 하지요.
사전에서 베낀 것이니, 패스해도 돼요.
초롱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재질 동사(銅絲), 철사(鐵絲), 대오리(竹絲), 나무, 수수깡 용도 제등(提燈) 정의 등불이나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외피를 씌운 옥외용 제등(提燈).
내용 초롱에는 지초롱〔紙燭籠〕·사초롱〔紗燭籠〕·조족등(照足燈)·북등〔鼓燈〕이 있다. 크기는 15~50㎝ 정도이며 재료는 동사(銅絲)·철사(鐵絲)·대오리〔竹絲〕·나무·수수깡으로 만들었고 내부 바닥 중심에는 초꽂이를 부착하였다. 표면은 백지나 유지(油紙) 또는 깁〔紗〕을 발랐으며, 유리가 수입된 뒤로는 유리를 끼우기도 하였다.
① 지초롱 : 나무와 대로 골조를 하여 만든 사각육면체·육각팔면체·팔각십면체의 틀에 백지나 유지를 바른 것으로, 한 면에 문을 내어 개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부에는 화기(火氣)가 빠지도록 원형·팔각형의 투공을 하였고, 손잡이는 나무나 대로 만들었다. 대나무 자루 중에는 대의 공동을 이용하여 예비 초를 넣게 만든 것도 있다. 지초롱에는 종이로만 만들어 접으면 납작한 지갑처럼 되는 작은 것도 있어 도포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었다.
야사(野史)에 명재상 이항복(李恒福)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황 중에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할 때 도포 속에 넣어두었던 초롱을 꺼내 길을 인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의 초롱이 이러한 접을 수 있는 작은 초롱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② 사초롱 : 일반 초롱보다 크기가 훨씬 크며 타원의 농(籠) 형태를 보인다. 길이 30~70㎝, 너비 1㎝ 미만의 납작한 철이나 놋쇠 또는 대오리를 활처럼 휘게 하여 양끝을 맞물렸으며 내부 바닥에는 초꽂이를 고정시켰다.
표면은 자루처럼 만든 청사·홍사·흑사·황사로 씌웠으며 손잡이는 나무나 대로 만들었다. 사초롱은 고려 때에는 궁중의 연회에 사용하였으나 조선 초·중기에는 절약을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다.
초가 양산되는 후기부터 궁중의 연회와 국왕의 거동 시뿐 아니라 일반인의 혼례에도 사용하였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사를 벗기고 살을 모아 접어서 보관하였다. 이 사초롱에는 살을 반으로 접을 수 있도록 한 간편한 것도 있다.
하단의 사진 설명에 따르면, 1. 주칠방형초롱, 2~3.초롱. 4. 조족등. 5. 지초롱. 6. 사초롱.
③ 조족등 : 철사나 동사 또는 대오리를 둥글게 휘어 둥근 박처럼 만들어 표면에 유지를 바른 것이다. 하부에는 지름 10~15㎝ 정도의 원형 개구(開口)를 내어 마치 둥근 항아리를 엎어놓은 형태를 보인다.
내부의 초꽂이는 등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자재로 회전하여 수평이 유지되도록 설계되었다. 손잡이는 나무나 대로서 등의 정상에서 수직 되게 달아 밑의 개구부가 발 앞을 비추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발을 비춘다 하여 조족등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일명 탐조등(探照燈)이라고도 하며, 포졸들이 순라를 돌 때 들고 다녀 도적등이라고도 불렀다.
조족등은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수입한 동사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사 외에도 철사나 대오리로 만들었다. 동사등의 원형은 남조의 송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농가에서 사용하였던 갈등롱의 재료가 뒤에 동사로 바뀌어진 것이라 한다.
이 조족등의 표면은 동사나 대오리에 의하여 나타난 돌기로서 독특한 주름문이 형성되었다. 이 주름문 위에는 팔괘문·원내화문(圓內花文)·문자 등을 장식하였다. 정교하게 만든 것 중에는 손잡이 주위에 8개의 작은 환기공을 투공한 것도 있다.
④ 북등 : 1850년경부터 1910년대까지 사용되었던, 나무판에 수수깡을 엮어 만든 값이 싼 제등이다. 사방 5㎝ 정도의 나무판 위에 길이 60㎝ 정도의 댓가지를 구부려 대각선으로 박아 손잡이를 삼고 수수깡으로 둥글게 틀을 하여 종이를 바른 것으로 북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북등이라 하였다. 1900년대 초에는 한지를 심지로 한 지초를 넣어 한 개에 5전씩 팔았다고 한다. - <민족문화대백과>
열원(熱源)을 기준으로 등불을 분류하면 목재를 태워 그 불꽃을 광원(光源)으로 하는 횃불, 관솔에 불을 붙인 관솔불, 기름에 심지[燈心]를 담가 점등하는 등잔불, 초를 사용하는 촛불, 석유를 사용하는 남포등불 등이 있다. - <두산백과>.
우리동네표 섬초롱꽃. 번식력이 강해서인지, 정원을 너머 길가에까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아침햇살로 꽃 안에 촛불이 들어 있는 듯 보인다.
산에서 만나는 초롱불은 초롱꽃, 도심에서 보이는 초롱불은 섬초롱꽃이 많은 듯합니다. 둘 다 초롱꽃과에 속하는 사촌들입니다.
번식력이 왕성해서인지, 원예업자들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섬초롱꽃 설명 시작합니다.
초롱꽃과초롱꽃속의 여러해살이풀.
한국특산종으로 울릉도에서 자라요.
영어 이름은 Korean bellflower.
학명은 Campanula takesimana Nakai
꽃은 6~8월에 핍니다. 꽃의 색깔이 다양해 헷갈리기도 합니다.
긴 꽃줄기 끝에서 밑을 향해 달려 종(bell)이나 초롱, 풍경(風磬)을 연상케 하지요.
꽃차례는 총상꽃차례이며 꽃자루는 길이 2.0~11.7cm로 털이 약간 있어요. 꽃은 길이 2.3~4.0cm로 연한 보라색의 꽃부리에 같은 색의 더 짙은 반점이 많습니다.
꽃부리의 끝은 5개로 갈라지며 넓은 삼각형.
수술 5개, 암술 1개. 암술머리는 3개로 갈라집니다.
섬초롱꽃 내부. 수술 5개, 암술 1개. 암술은 3갈래로 갈라진다. 배경에 있는 옥외 전등도 발길을 비춰주려는 뜻이라면 초롱꽃과도 통한다.
높이 30~155cm 정도로 자라요. 줄기는 곧추서며 두껍고 자주색을 띱니다. 줄기잎은 어긋나며 달걀 모양 삼각형 또는 심장형으로 광택이 있고 흰색 털이 있어요. 잎은 길이 2.6~11.9cm, 너비 1.2~7.9cm. 잎끝은 뾰족하고 밑부분은 심장 모양이며 잎 가장자리에는 예리한 톱니가 있습니다.
열매는 삭과로 8~9월에 성숙해요. 모시나물, 섬초롱, 자반풍령초, 풍령초, 흰섬초롱꽃으로도 불립니다.
꽃말은 감사, 기도, 천사, 충실.
사촌뻘로 금강초롱꽃, 자주초롱꽃, 흰섬초롱꽃, 자주섬초롱꽃이 있어요.
왼쪽이 초롱꽃. 오른쪽은 섬초롱꽃. 전체적으로 꽃의 색감에 차이가 있다. 초롱꽃 사진 = 들꽃사랑연구회
섬초롱꽃은 초롱꽃과 아주 비슷한데요. 초롱꽃보다 크고요. 잎은 광택이 나고 꽃은 연한 자줏빛에 짙은 반점이 있습니다.키도 크고, 꽃이 많이 달립니다.
초롱꽃도 자주색 빛과 반점이 있지만, 녹색이나 황백색이 돌아요. 꽃이 많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좀 작습니다. 줄기와 잎에 거친 털이 많습니다.
어떤 시인은 초롱꽃을 어머니의 삼베 속곳과 같은 꽃이라고 했어요.흰 듯, 누른 듯, 녹색인 듯 인공으로는 흉내내기 어려운 색감. 그래서 백의민족 고유의 색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초롱꽃과 설명이 뒤섞여 더 헷갈리게 만들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나 동네 이곳저곳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섬초롱꽂들이 다양한 변이를 보여 많이 헷갈렸어요.
금강초롱꽃.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금강산에서 최초 발견되었다는 금강초롱꽃은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을 테니, 저와는 인연이 닿지 않을 것이라 여겨져 한편 슬프기도 합니다.
■ 서두에서 '초롱'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고 어렵고 딱딱했지요?
대충 끊거나 요약할까 하다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인 사전인지 맛보기용으로 전문을 실었습니다.
다음의 그림 한 점만으로 금세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일부러 먼 길 돌아온 거죠^^
조선시대 풍속화의 쌍두마차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도. 담모퉁이에서 만난 연인들의 모습이다. 갓을 쓴 선비가 들고 있는 게 초롱이다.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
1758년 출생, 사망연도 미상. 증조부와 아버지를 이어 3대째 도화서(조선시대 국가의 필요에 따라 그림을 그리던 관청)의 화원이었지만, 놀기를 좋아하고 음란한 구석이 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유분방했던 화가.
단원 김홍도는 서민 풍속화를, 혜원 신윤복은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양반가의 풍속화를 주로 그렸지요. 색감이 화려하고, 배경 묘사에 공을 들일 수밖에요.
각설하고ᆢ.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평한 위의 그림 설명 들어보실까요.
눈썹달이 침침하게 내리비치고 있는 야밤중에 등불을 비춰 든 선비 차림의 젊은이가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과 담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이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호젓한 곳에서 남의눈을 피하여 은밀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예법을 생명으로 알던 왕조귀족들로서 비록 그 상대가 노는 여자라 할지라도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이가 내놓고 여자와 만나 노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층층시하에 있는 젊은 선비가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집을 빠져나오느라 이렇게 밤 깊어서야 만난 모양이다.
여인은 밤이 늦어서야 나타난 사나이가 야속하다는 듯 여간 새침을 떨지 않으니 답답한 남자는 무엇으로나 달래 보려는 듯 품속을 더듬어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야 두 사람이 어찌 각각 모를 리가 있겠는가. 만난 일이 반가워서 벌이는 실랑이일 뿐이다.
그래서 화제(畵題)에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하였으니,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런 애틋한 사랑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야삼경은 자정 무렵입니다. 밀회하기 딱 좋은 시간대인가요?
■■ 이 그림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설명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담장 위로 보이는 초승달이 뒤집혔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신윤복이 이를 잘못 그린 게 아니고 사실은 월식으로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천문학계에서는 이 그림을 그린 날을 계산해 냈는데 바로 신윤복이 36살 되던 해인 1793년 8월 21일이라고 짐작합니다."
-김영조, <우리문화신문>
■■■ 인간이나 꽃이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은 겸손하다는 뜻으로 읽혀 사랑을 받아요.
감사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충실한 모습이 모두 겸손에서 나오지요.
밀레의 <만종>처럼요.
너무 겸손해 굴종하는 모습도 딱하지만, 고개 빳빳이 들고 하늘 향해 어퍼컷을 하는 모습도 썩 보기 좋지는 않더군요. 어퍼컷은 홈런 친 타자나 골을 넣은 선수가 하는 세리머니인 줄 알았는데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