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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밭골샌님 Aug 14. 2024

골목길 야생화 52 배롱나무

100일 동안 이어달리기로 꽃을 피우는 나무


배롱나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가는 붉은 꽃 없다.

- 양만리, 송나라 시인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시인

백일 정도 피는 꽃이 있다면, 오래 볼 수 있는 거겠지요?
이만큼 오래 볼 수 있는 꽃으로는 우리나라꽃 무궁화(無窮花)가 으뜸입니다.
여름 내내 볼 수 있으니까요. 끝이 없는 것을 일러 무궁무진하다고 하는데요. 무궁화도 꽃이 끝 모르게 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무궁화와 쌍벽을 이루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름조차 목백일홍(木百日紅).
정식 명칭은 배롱나무.
백일홍나무, 배기롱나무, 배이롱나무, 배롱나무로 발음이 변해왔다고 전해집니다.

멕시코가 원산인 한해살이풀 백일홍은 원예종으로 늦게 도입된 것이고요.
중국 남부가 원산인 배롱나무는 고려시대 문인들에게 사랑받을 정도로 이 땅에 정착한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은 배롱나무를 그 이름, 꽃모양, 이어달리기식 개화, 얇은 나무껍질과 간지럼, 시인묵객들의 노래, 배롱나무 명소를 키워드로 소개합니다.

시작합니다.

부처꽃과의 잎지는 중간키나무(낙엽활엽소교목).
높이는 5m쯤. 줄기는 엉성해서 나무 전체 모양이 고르지 못한 편이지만, 둥근 부채꼴을 이루기도 합니다.

나무껍질은 적갈색인데, 얇게 벗겨져서 줄기에 얼룩이 잘 집니다. 나중에는 흰색으로 껍질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일 년생 가지는 모가 나고 뿌리부터 움가지가 잘 돋아나요.

타원형의 두꺼운 잎이 마주나며, 길이는 2.5~7cm. 표면에 윤기가 있고 뒷면 잎맥을 따라 털이 있고요.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고, 잎자루도 거의 없습니다.

꽃은 가지 끝에 원뿔모양꽃차례로 달리는데, 아래쪽에서 위로 피어올라갑니다.

한 번 피면 곧바로 지지만, 다음 꽃이 이어서 피기에 여름내내 피는 듯 보이지요.


암수한꽃으로 진한 분홍색.
꽃잎 6개, 꽃받침 6개. 특이하게도 꽃이 주름져 더 붉게 보입니다.
수술은 30~40개. 가장자리의 6개가 길어요. 암술은 1개이고 암술대가 수술 밖으로 나오지요.

암수한꽃으로 진한 분홍색. 꽃잎 6개, 꽃받침 6개. 꽃이 주름져 더 붉게 보인다. 수술은 30~40개. 가장자리의 6개가 길다. 암술은 1개.


10월에 익는 열매는 삭과로 노란 콩을 닮았어요. 길이 1.2cm 정도. 다 익으면 6개로 갈라지는데, 각각의 안에 작은 씨앗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백일홍'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한 번 핀 꽃이 백일을 가는 건 아니라고 했지요? 원뿔처럼 생긴 꽃대의 아래로부터 위로 꽃이 연달아 피었다 져요. 여름내 계속 피어 있는 듯 보이는 건 바로 이어달리기식 개화 때문입니다.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므로 추위에 약해서 우리나라에서도 남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어요. 지구온난화와 위대한 원예사들 덕분이죠.

원줄기는 연한 홍자색인데,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벗겨진 부분이 백색으로 변하며 매끄러워져요. 오래된 나무는 상아(象牙)처럼 반들반들합니다.
원숭이도 미끄러질 정도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사루스베리(원활, 猿滑).

중국의 꽃 백과사전인 <군방보(群芳譜)>에는 파양수(怕癢樹: 두려워할 파, 가려울 양, 나무 수)라고도 하는데요. 뜻 그대로 '간지럼을 무서워하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충청도에서도 '간지럼나무'라고 부르며, 제주도에서는 '저금타는 낭(간지럼 타는 나무)'이라고 부른답니다.


원줄기는 연한 홍자색, 껍질이 잘 벗겨지고, 백색으로 변하며 매끄러워진다. 오래 된 나무는 상아(象牙)처럼 반들반들하다.


■ 이 친구 만나거든 줄기의 하얀 무늬를 손톱으로 긁거나 어루만져보세요.
저 역시 남의눈을 피해 긁어보곤 하는데요.
꽤 굵은 줄기 부분을 건드려도 꽃잎과 가지가 흔들거리는 듯해요.

나무가 간지럼을 탄다?
이 의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식물에는 신경이 없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을 긁는다고 다른 쪽이 반응할 수 없으니 터무니없다.'는 설.
'수피가 매우 얇기 때문에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잎이나 줄기로 바로 전달돼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는 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줄기가 뿌리 쪽에서 갈라지지 않고 약간 위쪽에서 균등한 굵기로 갈라지기 때문에 관목도 아니고 교목도 아니다. 어쨌든 어느 한쪽 가지를 들면 다른 가지도 약하게나마 흔들리기는 하다. 게다가 꼬불꼬불한 레이스 형태의 꽃잎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말 간지럼을 타는 것인지 우스개 소리인지가 참 애매모호하다.'
- 웃는소나무, <꽃이 가르쳐주었다>

제주도에선 줄기가 해골처럼 보이고, 꽃은 피 같이 붉어 불길하다고 해서 집안에는 심지 않는다는군요.

목질이 강하고 튼튼해서 세공 재료로 많이 쓰고요.
배롱나무의 꽃은 한약명 자미화(紫薇花), 뿌리는 자미근(紫薇根), 잎은 자미엽(紫薇葉)이라고 해서 생리불순 등 여성질환에 쓴답니다.


한여름을 수놓는 처연한 붉은빛이 시심을 일깨우는 걸까요?
강희안은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빼앗는 듯 피어 있으니 품격이 최고'라고 썼고요.
성삼문은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 잔 하리라'라고 노래했어요.


전국의 사찰이나 사당, 높이 기려야 할 조상의 무덤 주변에는 어김없다고 할 만큼 배롱나무가 있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배롱나무 명소로는 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鳴玉軒 苑林), 전북 고창 선운사,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부산진구 양정동의 배롱나무, 전남 강진 백련사, 경주 서출지(書出池) 등이 있습니다.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소쇄원(瀟灑園), 식영정(息影亭)과 광주시 북구 충효동 환벽당(環碧堂)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즐비한 증암천(甑巖川)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었다고 해요.
선비들이 사랑한 나무임을 증명합니다.


전국의 사찰이나 사당 앞, 높이 기려야 할 조상의 무덤 주변에는 어김없다고 할 만큼 배롱나무를 볼 수 있다는데요.
붉은 꽃은 오로지 충성하는 마음, 즉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상징하고, 껍질이 거의 없는 건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표리일치(表裏一致)를 상징하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한 배롱나무는 조선시대 초기 사육신의 한 분으로 충남 논산에 있는 성삼문의 묘, 앞서 소개한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부산진구 동래 정 씨 시조 묘,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 장군의 묘지인 대구의 표충단 배롱나무가 유명하답니다.
- 강판권, <선비가 사랑한 나무> 요약.


영어명은 크레이프-머틀(crape-myrtle).
'크레이프(crape)'는 '주름진 비단', '머틀(myrtle)'은 '도금랑(桃金娘)'이라는 뜻. 꽃잎이 주름진 비단처럼 보인다는 데서 붙여진 겁니다.

흰꽃 피는 흰배롱나무도 있고요.
최근 원예종으로 인기를 끄는 배롱나무도 많습니다.

꽃의 색도 진분홍, 연분홍, 보라색으로 다양하고요. 낮은 키의 미니배롱나무도 있습니다.

한자 이름은 자미(紫微), 자미화(紫薇花), 파양수(怕癢樹), 만당홍(滿堂紅).
꽃말은 '부귀, 애교, 웅변, 꿈, 행복, 수다스러움,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


흰 꽃이 피는 흰배롱나무.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 우리 현대시 중 배롱나무를 읊은 시.

목백일홍 - 도종환

살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는 것이다.

결국 배롱나무 꽃이 백일을 가는 비결, 사람이 늘 사랑스러워 돌아서면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이 되는 비결, 그건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는 것'이라는 노래죠?

일신, 일일신, 우일신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배롱나무!
그 아래서 나무와 더불어 한잔 하겠다는 성삼문의 저 호방한 기개!
언제쯤 저런 밝은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볼 수 있게 될까나ᆢ.


■■■ 백일 동안 피는 걸 지켜본 사람?

'8월 중순~9월 중순에 개화한다.'
-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배롱나무 개화 기간에 대한 표준으로 통용되는 설명입니다.
8월부터 9월까지 핀다고 하면 최소 30일 남짓, 최대 60일이지, 아무리 어림잡아도 100일은 너무 과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설명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군요.

'그리고 비밀도 아닌 비밀이지만 백일홍과 배롱나무의 개화기간은 사실 100일이 안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고금의 좋은 전통인 ‘에누리’가 있습니다. 눈감아주세요.'
- 정진영 기자, 헤럴드경제

위의 글처럼 배롱나무 꽃이 실제로는 100일씩이나 피는 건 아니고, 에누리가 있으니 눈감아달라고 하는데요.

이걸 직접 관찰해 기록으로 남긴 옛사람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 신경준은 배롱나무꽃이 얼마나 오래 피어 있는가 관찰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나 100일 하고도 열흘 남짓 붉은빛을 유지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부분의 꽃이 한꺼번에 피고 지는데 배롱나무꽃은 나누어서 피어나 100일이 넘도록 붉은빛을 유지한다며 배롱나무를 '절도 있는 나무'라 칭송하였다. 신경준도 그렇고 배롱나무 꽃을 읊은 옛 시인들도 대부분 그 꽃이 100일 동안 붉은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성범중 외, <알고 보면 반할 꽃시>

중국에서는 음력 5월부터 벼를 베는 9월까지도 핀다고 하니, 100일 이상 핀다는 설이 맞을 것 같습니다.

■■■■ 중국명 자미는 무슨 뜻?

중국에서는 배롱나무의 정식명칭이 자미(紫薇)입니다. 보라 자, 장미 미.
보라색 꽃이라는 뜻이지요.

당나라 현종은 황제의 문서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으로 이름을 바꿔요.
이 또한 배롱나무가 많은 곳이라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요.
사실, 자미(紫微 보라 자, 작을 미)는

자미원에 있는 별의 이름입니다. 즉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동북쪽에 15개로 벌려 있는 별 중의 하나로 천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꽃이름이 아닌,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개명을 했다고 보는데요.
이 덕분에 배롱나무는 왕중왕 나무라는 별명을 덤으로 얻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북두칠성으로부터 북극성을 찾는 방법이 묘사되어 있는 사진. 자미성을 북극성이라고도 하는데, 천자를 의미한다. 출처= Miguel Clero.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 아니라, '글이 길어 슬퍼지는 저'입니다.

쾌도난마, 일목요연, 단순명쾌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오늘의 글을 닫습니다.


2024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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