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efore Coron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동 May 12. 2021

흔한 사가(佐賀), 야나가와(柳川) 여행기 [1]

게스트하우스의 인연

여행지를 사가로 정한 이유, 간단합니다. 티켓이 저렴했습니다. 공항이용료와 유류할증료만 내면 되는 특가였거든요. 정확한 가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10만 원 아래였던 거 같습니다. 대학생이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으는 돈으론 제주도 정도, 그러니까 왕복 10만 원 정도가 상한선입니다. 그 금액 이상의 표는 선뜻 결제버튼이 눌리지 않습니다. 사실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입니다. 다녀오면 삼시세끼 라면만 먹어야 하는 거죠. 다행히 라면은 좋아합니다. 종류도 다양하구요.


창가 자리를 고르는 이유


오후 3시 40분, 한창 학기가 진행되는 금요일. 회사원들은 칼퇴를 꿈꾸고 대학생들은 불금을 준비하는 그 시간에 저는 동해 상공에 있었습니다. 남들은 바쁜 일상을 보낼 때 홀로 여행길에 오른다. 배덕감이 가득합니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구름의 정수리를 보는 건 언제나 새롭습니다. 고대 권력자들이 높은 곳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광경들이 그들 눈 앞에는 펼쳐지거든요. 구름으로 이런 기분이 드는데 달의 뒷면을 처음 본 우주비행사는 얼마나 벅찼을까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뭐든지 첫 경험은 뇌리에 강렬히 박힙니다. 저도 처음 타본 비행기가 기억이 납니다. 2000년, 나이로는 8살 때였습니다. 가족여행으로 뉴질랜드를 갔습니다. 그 비행에 좋은 기억은 없었습니다. 이착륙은 특히 최악이었습니다. 어려서 고막이 약했는지, 기압의 변화에 민감했는지 귀 통증이 심했습니다. 창가에 보이는 구름 같은 건 볼 여력이 없었죠. 만일 봤었더라도 기억에 없는 거 보니 고통이 기억을 다 덮어버렸나 봅니다. 그래도 기내식은 먹을 만했지, 까지 생각했을 무렵 착륙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라는 방송이 들려옵니다.



5시쯤 사가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캐리어 대신 큰 백팩을 챙겼기 때문에 수하물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 부근의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높은 건물이 없는 야트막한 스카이라인에 시선이 계속 머뭅니다. 전신주를 잇는 전선엔 까마귀들이 잔뜩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려는지 노을이 벌써 지려고 합니다. 타오르는 역광을 받은 까마귀들은 실루엣만 남아있습니다. 거미줄처럼 늘어진 전선에 빼곡한 조류의 형상.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게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도 풍깁니다. 한국에선 흉조로 알려져 있는 까마귀이지만 여기는 일본이니 날아도 배가 떨어지진 않을 거란 생각도 해 봅니다. 앞으로의 여행이 불길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보단 당장 주린 배를 무엇으로 채울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인 고민일 것입니다.



어떤 여행지로 가든 정해놓은 규칙이 있습니다. 저녁에 도착하면 국물이 있는 기름진 음식을 먹기로 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도착해서 먹는 첫 끼니는 무척 중요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앞으로의 여행도 즐거울 것이란 예감이 들죠. 모순인 것은, 이렇게 첫 식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미리 계획을 짜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닌 인간입니다. 물론 학기 중이었으므로 뭔가 조사하고 계획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는 특수성은 이해해 줘야 합니다. 다급히 구글 맵스에서 저녁 식사 레스토랑을 찾아봅니다. 지금 상태는 배가 매우 고프므로 금방 나오는 메뉴를 파는 집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더라도 첫 끼에 인내심을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어 요리 전문점. 너무 멀리 있습니다. 패스합니다. 고급 가이세키 레스토랑. 돈도 없고 보통은 예약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넘어갑니다. 라멘 가게. 묵직한 국물에 돼지기름을 섞은 것처럼 보입니다. 가격대 적당합니다.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라멘입니다.



체크인을 하고 라멘집으로 향합니다. 구글 맵스에 동일한 이름의 매장이 몇 군데 있는데 다른 지역에 없는 것으로 봐서는 로컬 프랜차이즈 매장인 듯싶습니다. 들어서자 점원이 쾌활한 인사와 함께 무언가를 말합니다. '~까'로 문장이 끝나는 걸 보니 의문문입니다. 일본어는 할 줄 모르지만 세계 어딜 가더라도 음식점의 응대 순서는 비슷합니다. 지금은 몇 명인지 물어보는 단계입니다. 눈치껏 검지 손가락을 펴 1명임을 어필합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던 기억을 끌어올려보며 짧은 회화도 시도합니다. 히토리데스. 적중. 뭐라고 또 말씀을 하시지만 역시나 못 알아듣겠습니다. 손짓을 보아하니 아마 편한 자리에 앉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찌(카운터)에 자리 잡고 메뉴판을 봅니다. 혼자서 일본 음식점이라. TV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이 된 기분입니다. 어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본어 한 문장을 나지막이 내뱉습니다.


우롱 오네가이시마스


다시 메뉴판을 봅니다. 음식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각종 식자재를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히라가나만 읽을 줄 아는 까막눈인 것이지요. 메뉴 이름 옆에 사진이 붙어있긴 하지만 화질이 썩 좋지 못합니다. 결국 마법의 문장, "오스스메 구다사이"를 사용합니다. 꼬르륵 소리가 꽤 큽니다. 라멘 한 그릇으로는 배가 차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교자만두는 일본어로도 교자라 말하니 하나 추가로 주문합니다.


라멘(좌) 교자(우)


사가 현이 돈코츠 라멘의 발원지인 후쿠오카(하카타) 현과 가까워서 그럴까요? 돈코츠라멘이 나옵니다. 냉면에 나오는 계란을 먼저 먹는 것처럼 적당히 익은 아지타마고를 먼저 먹으며 식사를 시작합니다. 렝게로 국물을 뜹니다. 묵직한 돼지의 향미가 위장에도 일본에 왔음을 알려줍니다. 노동자의 라멘이라고도 불리는 돈코츠라멘의 특징 중 하나는 호소멘(세면)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면이 얇아 금세 익으니 메뉴를 빨리 내줄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요, 고된 육체노동 후 퇴근하는 항만 노동자들의 발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속도입니다. 면발에 육수도 많이 딸려와 입안에 풍부한 감칠맛이 밀려옵니다. 라멘이 나온 타이밍에 맞추어 교자도 나왔습니다. 라유를 적당히 뿌려 찍어먹습니다. 지역 프랜차이즈로서는 괜찮은 맛입니다. 배불리 먹고 나왔습니다. 맥주도 마시고 싶었으니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갑니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오니 체크인했을 때와는 다르게 많은 사람으로 왁자지껄합니다. 1층은 로비 겸 바(bar)로 운영하고 있는 곳인데, 술 마시러 온 손님들로 가득합니다. 게스트하우스 투숙객도 있고 바 이용객도 있습니다. 사 왔던 맥주를 넣어놓으려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화려한 도시락 같은 것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제 시선을 점원이 느꼈는지 일본어로 말을 건넵니다. 음식점 같은 경우야 응대 매뉴얼이 비슷하니 눈치껏 알아듣겠지만 이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쩔 줄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바에 앉아있는 손님 중 한 명이 익숙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같이 먹지 않겠냐고 물어보네요." 고국의 말, 나의 마더텅 한국어!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아셨냐고 하니 행색이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었답니다. 음식을 남겨놓겠단 말도 덧붙입니다. 감사하다고, 짐만 풀고 오겠노라고 말한 후 돌아왔습니다.


문제의 도시락(?) 같은 음식


마련해주신 자리에 앉았습니다. 화려한 도시락 같은 이 녀석의 구성물을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어란부터 시작해 각종 생선 요리, 과일, 채소 등 정말 일본스러운 음식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걸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보니 저의 구원자께서 이 도시락을 가져오신 분에게 여쭤봐 주십니다. 오세치(おせち料理)라는 것으로 원래는 새해에 먹는 음식인데 샀다고 합니다. 설날 되면 전 부치고 추석 되면 송편 빚는 개념인가 봅니다. 아무리 라멘과 교자로 배가 불렀다 해도 이런 행운을 지나칠 수는 없지요. 젓가락을 들고 한 점씩 먹어봅니다. 기름에 절여진 위를 진정시켜주는 건강한 맛! 이런 음식엔 맥주가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편의점에서 사온 캔맥주를 꺼내와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때마침 생맥주까지 팔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여행자의 돈을 뺏어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마비-루 구다사이!"


'도조.' 생맥주 한 잔이 나왔습니다. 일본어로 뭔가 설명을 곁들입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영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웬걸, 영어로 설명해줍니다. 진작 영어였으면 상호 간 편안했을 텐데.. 이제라도 다행입니다. 'NOMAMBA'라는 사가 현의 지역 맥주가 생맥주로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NOMAMBA는 사가 현 방언으로 '마셔라'라는 뜻이라는 여담도 곁들입니다. 감격적인 첫 맥주! 사진을 남기고자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DSLR을 챙겨갔더니 프로 사진가인 줄 알고 짐짓 놀라는 눈치입니다. 이 사진의 퀄리티를 봤었어야 그런 오해를 안 할 텐데요. 그냥 취미 삼아 찍는다고 말한 후 셔터를 누르려는 그 순간, 점원이 웬 호박을 프레임 안으로 넣어줍니다. 맞습니다. 곧 할로윈이지요. 한국에선 따로 할로윈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이태원이나 홍대 등지에서 코스튬한 사람들의 사진은 본 적 있지만 그건 그들만의 문화라고 생각했지요. 또 하나의 첫 경험이 만들어집니다.



맥주가 한두 잔 들어가니 자연스레 옆자리 손님들 그리고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입니다. 저는 영어와 한국어를, 점원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제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주신 분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도시락을 가져오신 분은 일본어만 할 줄 압니다. 오키나와에서 여행 온 일본인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얽히고설킨 통역 한바탕에 어느새 오키나와에서 온 모토노부 군과 친해졌습니다. 일본 전국을 돌고 있는 중인 그는 홋카이도에서부터 큐슈까지, 북에서 남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가 현이 쌀과 물로 유명한 지역이라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는 건 모독'이라며 니혼슈를 한 잔 삽니다.


모토노부 군이 사준 텐잔(天山)주조의 나마자케(生酒), 파란 병.


점원의 추천으로 텐잔이라는 회사의 나마자케를 한 잔 주문합니다. 한자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날것의 술이란 뜻인데요, 일반적인 사케와는 다르게 살균 과정을 거치지 않아 효모가 그대로 生하고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술잔을 겹으로 준 것이 재밌습니다. 저렇게 마쓰(松, 소나무)잔에 사케 잔을 넣고 넘치도록 따라서 줍니다. 어떤 방식으로 마시냐고 물어보니 우선 유리잔에 든 사케를 먼저 마십니다. 다 마시고 나면 그동안 홉에 담겨있어 나무 향이 배인 술을 마저 마시는 방식을 권합니다. 처음 맛본 나마자케의 맛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막걸리처럼 약간의 탄산감이 있습니다. 드라이하지 않고 단맛이 돋보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마시니 술맛이 배가 되어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어집니다. 



모토노부 군이 예전에 부산을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주기에 저도 자연스레 일본 여행지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자연스레 인스타그램 계정 교환도 합니다. 히로시마 현의 이쓰쿠시마(厳島) 신사를 꼭 봐야 한다며 추천해주는 그. 사진을 보니 바다 한가운데에 도리이(鳥居)가 있습니다. 보통 도리이는 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게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의 후시미이나리 신사의 센본도리이(千本鳥居)처럼 산길을 따라 연속해있는 건 봤지만 이렇게 해상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물만 연거푸 들이켜자 혹시 술이 부족해서 물을 마시는 거라면 자기가 한 잔 더 사겠다는 모토노부 군. 정말 고맙지만 사양합니다. 저는 아까 사온 캔맥주도 마셔보고 싶어서 나름의 주량 조절을 하던 중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웬만큼은 술을 잘 하는 줄 알았답니다. 지인들을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 같은 예외도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맥주 두 잔이면 안 봐도 이미 얼굴은 빨갛다 못해 터질 듯한 광경일 테니 말에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대접은 괜찮으니 내가 사 온 캔맥주를 나눠먹어 보는 게 어떻냐고 하니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는 게스트하우스 이전에 엄연히 바입니다. 따로 싸온 캔맥주를 마시는 건 짜장면 집에서 다른 집 짬뽕을 시켜먹는 경우가 아닌가 싶어 점원에게 여기서 외부 술을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니 점원도 괜찮다고 합니다. 지체 없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옵니다. 서로의 잔이 부딪히려던 순간, 손을 빼며 한국의 건배사는 뭔지 궁금해하는 모토노부 군. 건배! 라고 알려주니 다시 한 번 건배를 청합니다. 서로의 건배사를 외치며 한 잔 마십니다. 술 잘 못 마시는 사람을 한국말로는 '알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뜻이 재미있었던 건지 어감이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쓰'의 정확한 발음과 표기법도 궁금해합니다. 메모지에 한글로 적어주고 잠깐의 발음 교정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러스트가 귀여워서 샀습니다


드라이한 맛이 인상적이었던 개구리 맥주였습니다. 또 한참을 떠들다 보니 투숙객들도 슬슬 자러 가는 분위기입니다. 바 영업 종료 시간도 다가오는 것 같구요. 즐거웠다, 다음에는 네가 한국에 오든 내가 오키나와에 가든 할 테니 언젠가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먼저 방으로 돌아옵니다. 이를 닦아야 하는데 아뿔싸, 치약을 안 챙겨 왔습니다. 뒤늦게 방으로 들어오는 모토노부 군에게 혹시 아까 맥주 대신 지금 치약 한 번 빌려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 웃으며 칫솔에 짜 줍니다. 다음에 꼭 다시 보자는 인사와 함께 첫날밤은 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흔한 사가(佐賀), 야나가와(柳川) 여행기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