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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Jul 13. 2021

커피 도둑

놀랍게도 과장 없는 실화

아마 2018년쯤이었을 거다. 100년 만의 더위니 뭐니 하며 연일 보도가 쏟아졌다. 그만큼 더웠으니 에어컨 수요도 자연히 폭증했다. 설치도 당연히 미뤄졌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이 모레가 되고 글피가 되고.. 아무튼 자꾸 미뤄졌다. 덥기도 더운데 짜증도 나서 값싼 피서 목적으로 도서관에 갔다. 책 보면서 마실 요량으로 시원한 커피도 내려서 보온병에 챙겼다.



제목 쓱 훑고 재밌어 보이는 것들로 몇 권 골라와 6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읽다 보니 목이 말라서 보온병 뚜껑을 컵 삼아 커피를 따랐다. 상큼한 게 누가 내렸는지 참 잘 내렸다. 책을 다시 읽으려는데 누군가 내 오른손을 툭 쳤다. 옆자리 사람이었다. 아줌마와 할머니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녀는 내게 말했다.



"커피 향이 너무 좋다. 이거 어디 거야?"



짜증이 났다. 흐름이 깨졌잖은가. 나는 책 읽을 때면 음악도 거슬려서 잘 안 듣는 사람이다. 게다가 초면에 반말까지. 밖이었으면 바로 '저 아세요?'라고 반문했을 텐데 여긴 도서관이니 시끄럽게 할 수는 없다. 책 다음 내용도 궁금하니 대충 대답하고 넘겨야겠다 싶었다.



"에티오피아요."



다시 책을 읽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또 질문을 한다.



"나도 에티오피아가 맛있더라. 혹시 커피 맛 좀 볼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당당한 구걸에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불가였다. 이거 잘못 걸렸다 싶었다. 싫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뒤에 또 무슨 말 같잖은 소리를 할지 도저히 예상이 안 됐다. 그래, 누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한 잔 주고 마는 게 오히려 지혜롭겠단 생각에 그냥 줬다. 빨리 책을 다시 읽어야 되기도 하니까.



그 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읽었다. 대충 한 챕터가 끝나니까 목이 말랐다. 커피를 마시려고 따르는데 어라, 방울방울만 떨어진다. 보온병 뚜껑 잠금을 안 풀었나? 중앙에 빨간 버튼을 눌러봤다. 확실히 잠금을 푼 게 맞다. 커피가 다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하나, 내 오른쪽의 할줌마다.



몰려오는 화를 참고 옆을 돌아봤다.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그녀. 20대 초반,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며 갈고닦았던 온갖 부모님 안부 묻는 방법이 떠올랐으나 대뜸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일단 범인이 맞는지 물어는 봐야 했다.



"저기요, 아줌마가 제 커피 다 마셨어요?"

"왜 그래? 남은 거 없어?"



자기는 모른다는 듯 눈을 꿈뻑이며 대답한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미안하다고 해도 기분이 괜찮아지진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사과해도 바로 용서는 하지 않겠단 다짐과 함께 재차 따졌다.



"아니, 아줌마가 이걸 다 마시면 어떡해요?"

"그 커피 얼마나 한다고 그래, 많이 들어 있지도 않더만. 저기 자판기에서 내가 하나 뽑아줄까?"



이쯤 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화가 나지도 않는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물어봤다.



"뭐라고요?"

"아니면 나가서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사람이 저체온증에 걸리면 어딘가 고장이 나서 오히려 덥다고 느껴진다고 한다. 그녀의 킬링 벌스 폭격에 내 화를 담당하는 기관도 고장이 났는지 이제는 웃길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지 못했어야 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나와 소리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정상적인 말을 주고받지 않았으므로 대화라 할 수 없음) 손톱으로 발바닥을 긁었다가 코를 후비적 댔다. 그 손으로 내 보온병을 가져가 내 컵에 따라 마셨을 것이다. 아니, 당연하고 분명하고 자명했다. 커피가 다 떨어진 게 너무나 감사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내가 그 컵에 따라 마셨을 것 아닌가. 더는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서 읽던 책이고 뭐고 다 덮고 나왔다.



나는 그 뒤로 공공도서관을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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