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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위바위보쌈 Mar 14. 2024

보쌈이 없다면 족발이 왕이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할매집

"페이커가 없으면 쿠로가 왕이다."


몇 년 전 리그오브레전드 판에서 유행하던 말이다. e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이던 페이커를 위협하던 쿠로, 이서행 선수의 실력에 감탄하던 이들이 만들어준 문장이다. 페없쿠왕. 페이커에 버금가지만, 페이커 이상의 실력은 아닌. 누군가는 조롱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그만큼 쿠로가 대단한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보쌈과 족발의 관계가 비슷한 것 같다. 엄연히 다른 두 음식이지만,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같기도 하다. 부위가 겹치기도 하고, 가게에 따라서 만드는 방식이 같은 곳도 있다. 보쌈을 좋아한다고 하면 족발집을 추천해 주는 사람들의 심리도 "보쌈이나 족발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 족발은 보쌈을 이길 수 없다. 그건 공식이고 원리이고 이론이고 법칙이다. 그렇다고 족발이 별로인가? 아니다. 보쌈이 없다면 족발은 최고의 음식이다. 그만큼 족발 맛집도 상당히 많다.


보쌈을 좋아한 덕에 족발 맛집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게 됐다. 그래서 보쌈의 가족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자, 든든한 동반자인 족발도 조금씩 소개해보려고 한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할매집 입구

처음으로 소개할 족발 맛집은 경복궁 근처에 있는 곳이다. 미슐랭 맛집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꽤나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경복궁역 7번 출구를 올라와 쭉 걷다 보면 세븐일레븐이 나온다. 그 세븐일레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오면 유명한 맛집 '신안촌'을 가는 길이다. 신안촌으로 꺾지 않고 그 반대로 꺾으면 할매집이 나온다. 생각보다 찾기 쉬우면서도 구석에 숨어 있다.


이 골목에 있는 여러 집들은 이전에 있던 한옥을 개조한 곳이 많은데, 할매집은 그냥 진짜 할머니네 집 같다. 들어가면 그냥 집이다. 신안촌이랑도 비슷하다.


입구에는 족발들이 널브러져 있고, 선풍기가 그 족발을 말리고 있다. 아마도 겉바속촉을 만들기 위한 것 아닐지 생각해 본다. 약간의 위생적인 찝찝함이 있긴 하지만.


널브러진 족발들을 뒤로하면 안쪽에 식사하는 곳이 있다. 예전에는 좌식이었는데 근래 들어 식탁과 의자로 바뀌었다.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한다. 안쪽부터 차례대로 앉으면 된다. 안내해 주는 분들이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니다. 주문받는 분은 그나마 좀 친절한 것 같긴 하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할매집 메뉴판

이 집은 족발이 메인이지만, 감자탕도 꽤나 인기가 많다. 족발만큼 감자탕을 시키는 사람이 많다. 처음 갔을 때도 감자탕을 먹었었는데, 나쁘지 않은 맛이다.


자리에 앉으면 반찬이 세팅되는데 무김치, 상추, 새우젓, 양파절임, 고추장아찌, 마늘 등이 나온다. 반찬 리필은 셀프다.


주문을 하면 점원이 메뉴판에 체크를 해주고, 10~15분 정도 기다리다 보면 음식이 준비돼 나온다. 감자탕은 버너 위에 끓일 수 있게 나오고, 족발은 버너 위에 그릇이 올라간다.


이제부터 고기의 시간이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할매집 족발

이 집의 족발은 심심한 보쌈이랑 비슷하다.


요즘 유명한 족발집들은 달짝지근한 맛이 많이 난다. 보쌈집만큼이나 족발집도 많이 들락날락했는데, 서울 3대 족발이라고 알려진 만족오향족발, 영동족발, 성수족발이 다 달짝지근하다.


그런데 이 집은 달짝지근한 맛이 없다. 그렇다고 한방의 맛이 강하지도 않다. 그냥 고기의 맛이 강하다.


껍데기 부분에서는 매운 양념의 맛이 있다. 그래서 양념이 뭉친 곳을 먹으면 매콤함이 강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살코기 부분은 그냥 살코기 그 자체다. 육향이 진하게 난다.


굳이 따지자면 투박하다. 투박해서 오히려 신기하다. 맛이 없는 게 아니다. 뭔가 옛날 족발 같다. 예전에 시장에서, 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파트를 찾아오던 족발 장수들의 1만원짜리 족발 같은. 섬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충 만들지도 않은. 정말 '삶아낸' 고기의 맛이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매콤하면서도 무차별적으로 그 매움을 난사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스며들면서 입안에 남는다. 자극적이고 달달한 요즘 족발과 달리 무난하고, 평범하면서도 약간의 차별성이 있는 그런 고기의 맛이다.


아쉬운 점은 김치다. 여기에 좀 더 보쌈김치 같은 약간의 자극을 곁들인 김치나, 보통의 족발집들이 내놓는 무말랭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얀 무김치에 살짝의 고춧가루가 들어있긴 하지만, 고기와 조화로운 느낌은 아니다. 2% 부족한 느낌. 개인적인 맛평가일 수 있지만, 좀 더 자극적인 김치가 있었다면 정말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기만 두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족발이다. 처음부터 강렬하게 사로잡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녹아드는.


서울 종로구 내자동 할매집. 음식이 진열된 모습.

이 집은 미슐랭 맛집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미슐랭 맛집이 될만한가 의문이 살짝 드는 지점이하나 있다. 바로 서비스다.


맛으로만 따졌을 때 미슐랭일 수 있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내게는 살짝 심심하긴 하지만, 은근히 스며들고 기억에 남는 그 맛은 미슐랭 평가단들이 좋아할만하다.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다고 해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충분히 맛있다.


미슐랭의 기준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평가 기준에 친절함이 있다면 이 집은 점수가 깎일 것 같다. 내가 예민할 수도 있지만, 손님을 대하는 톤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 감점 요인이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훌륭한 평가를 받을 서비스는 아니었다. 조금의 개선만 있다면 서비스도 더 나아질 것 같다.


인왕산 근처에 이 집이 있다 보니 등산하고 들러서 막걸리 한 잔과 곁들이기에 참 좋은 곳이다. 감자탕도 맛있어서 여럿이 와서 족발과 감자탕을 함께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노포의 맛을 느끼기에도 분위기가 좋고, 맛도 괜찮은 편이다. 아쉬운 서비스가 흠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족발 자체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려면 이 집을 방문해 보는 걸 추천한다. 요즘 양념으로 승부하는 여러 족발집과 달리 이 집은 고기 자체로 승부한다. 그래서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고기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는 몇몇 보쌈집처럼, 이 집은 고기 본연의 맛으로 족발을 만들어낸다.


맛으로만 따지면 충분히 보쌈에 버금가는 수준의 족발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보쌈이 없다면 족발이 왕이라는 걸 보여주는 곳, 할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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