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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위바위보쌈 May 16. 2024

우리가 만났던 제주도 보쌈집

제주도 서귀동 천짓골식당,  두 번째 이야기

제주도 애월 해변의 모습

그 사람은 파란색 반팔에 흰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피부는 정말 하얬다. 하얗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눈은 맑았으며 코는 나를 향해 서있었고, 입술은 조그맣게 자리했다.


나는 보쌈을 먹으러 왔을 뿐이었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으니깐. 그래서 누구 어디 같이 먹을 사람 없을까. 그런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있었다.


생전 모르는 사람한테 쉽게 말 걸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데도 어디서 나온 용기일까. 한눈에 들어온 그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혼자가 아니면 어떡하지? 일행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거면? 그런 생각 따위 할 틈이 없었다. 어디서 생긴 지 모를 용기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혹시 혼자세요?"


괜히 내리깐 목소리로 말을 걸자 팔짱을 끼고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 사람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질문을 던진 나를 쳐다봤다. 약간 나를 훑던 그 사람은 짧게 "네"라고 대답했다.


서글서글하지 않은 답변에 살짝 상처를 입었지만, 이미 용기를 낸 상황. 두 번 못 낼 이유는 없었다.


"여기 혼자 먹기 애매한데 같이 드실래요?"


굳어있던 그 사람의 얼굴이 살짝은 풀린 듯 보였다.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나는 원래 내 자리로 그 사람을 데려가기보다는 그 사람의 자리에 같이 섰다. 어색한 분위기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제주도에는 왜 오셨어요?"


아까보다는 훨씬 대답의 텀이 짧아졌다. 그 사람은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행을 위해 제주도를 왔다고 했다. 그날은 평일이었고, 여름이었기에 여행을 위해 왔다면 나와 같은 대학생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쪽은요"


짧은 네 글자였지만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그럴싸해 보일까. 나는 장황하게 내 삶을 늘어놓았다. 아르바이트에 지쳤고 학업을 겨우 마치고 방학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아픈 인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며칠 전 직장을 그만뒀다고 했다. 통신사 회사에서 일하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 그만뒀다고 한다. 잠시 일을 쉬는 동안 머리를 식히러 제주도에 왔다고 했다. 왜 제주도냐고 묻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와밨다고 한다. 그것도 혼자.


이런저런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선에서 얘기하다 보니 줄이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줄이 줄어든 건지, 아니면 그 사람과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건지.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좌식으로 된 좌석들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제주 서귀동 천짓골 식당의 내부 모습

신발을 벗고 어색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종류였다. 흑돼지와 백돼지.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흑돼지를 먹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제주 사람들은 흑돼지를 먹지 않는다고. 똑같은 고기인데 뭐 하러 흑돼지를 먹냐고.


그 말을 나는 굳건하게 믿었다. "이모 여기 백돼지요!"를 외쳤다. 그리고 이 집은 쫀득함과 부드러움을 고를 수 있었다. 부드러운 부위를 요청했고 이모는 알겠다고 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내 앞에는 오늘 처음, 아니 몇 분 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있다. 이 사람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쉬기 위해 제주도에 왔으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식당에 혼자 줄을 서고 있었다.


왜 이 집인지, 왜 혼자 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됐는지 많은 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하려 하니 입이 떼지지 않았다. 그 사람 역시 적극적으로 내게 많은 걸 물어보지 않았다.


뜬금없이, 보쌈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쌈을 좋아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매력 어필이었다. 그 사람은 내 쫑알대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어줬다.


몇 분 간 보쌈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을 때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가 도마 위에 담겨서 나왔다. 우리 앞에 놓인 도마 위 고기는 이모의 손길에 슥슥 썰렸다.


이모는 썰어낸 고기를 우리에게 한입씩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백돼지 수육을 한입에 넣은 순간, 우리는 두 눈을 마주쳤다.


우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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