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회현동 서령
돼지고기 수육은 보통 삼겹살로 만들기 마련이다. 또는 앞다리살을 사용한다. 그런 수육을 항정살로 만든다면 어떨까? 그것도 별다른 양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돼지고기향이 가득하도록 만든다면 얼마나 맛있을까?
수육은 평양냉면집으로 가면 제육으로 변모한다.(참고: 평양냉면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보쌈 https://brunch.co.kr/@redlyy/25) 평양냉면집에서 시킨 제육은 정갈하고 깔끔한 편이다. 돼지고기 자체의 향을 우러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평양냉면과 무척 잘 어울린다. 자극적이지 않은 평양냉면에게 돼지고기 기름의 자극은 조화롭지 않을 수가 없다. 평양냉면과 제육, 이 둘이 당길 때면 떠오르는 곳들이 몇 곳 있다. 강남의 진미평양냉면, 종로의 유진식당, 서초의 설눈 등이다.
전통의 평양냉면집과는 다르게 색다른 매력을 뽐내는 곳이 오늘 소개할 집이다. 이 집은 남대문 한복판에 있다. 서울역과 회현역 사이에 있는데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회현역을 통하는 것이 조금 더 가깝다.
회현역 5번 출구나 서울역 4번 출구를 통해서 골목을 따라 걸어오면 단암타워 건물을 찾을 수 있다. 주변과 달리 조금은 새 건물 같은 느낌인데, 이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있고 그 옆에 바로 서령이 있다.
서령은 캐치테이블 대기가 가능하다.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꿀팁이다. 미리 대기를 걸어놔도 된다. 브레이크타임이 없기 때문에 애매한 시간대를 노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도 자리가 빨리빨리 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웨이팅하지는 않는다.
서령의 내부는 상당히 깔끔하다. 새로 지은 듯 내부 인테리어는 하얗고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이유가 있다. 바로 강화도에서 오랜 기간 장사를 해오던 사장님이 최근 남대문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내부가 깔끔하다고 전통이 없다는 편견은 잠시 버려도 된다. 이 집은 꽤나 전통을 지켜오는 집이다.
서령의 메뉴판은 키오스크 형식이다. 어르신들도 보기 쉽게 돼 있다. 결제는 키오스크에서 하지 않고 나중에 나갈 때 하면 된다. 메뉴는 단순하다. 식사류, 요리류, 주류 등이다. 식사류는 '순면'이라고 해서 평양냉면과 비슷한 메밀면이 자리한다. 다소 낯선 냉국밥도 일일 한정 30그릇으로 팔곤 하는데 먹어본 적은 없다. 만둣국도 판다. 서령 순면, 비빔 순면, 들기름 순면이 제일 상단을 차지한다.
요리류는 안주류가 있고 수육과 제육이 있다. 수육은 오늘의 수육이라고 해서 아침에 갓 나온 한우 양지 수육이며 제육은 항정살로 만들어졌다. 한 접시가 200g, 반접시가 100g이다. 만두도 판다.
역시 보쌈을 사랑하는 내게 선택지는 단 하나. 항정 제육이다. 고민도 하지 않고 항정 제육을 시킨다. 뭔가 허전하니 만두도 하나 시켜준다. 식사는 나중의 일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정갈하게 담긴 항정 제육과 무김치가 나온다.
이제부터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이 집의 제육은 항정살로 만든 탓인지 얇고 길다. 얇고 길지만 양이 적진 않다. 보다시피 여러 겹의 항정살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항정살은 기름이 많아서 느끼할 수 있는데, 불필요한 기름들은 다 걷어낸 느낌이다. 살코기 자체로도 이미 부드럽기 때문에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기름들의 양을 줄인 것은 좋은 선택 같다.
고기 자체로 평가하자면 상당히 질 좋은 고기를 쓴다는 확신이 있다. 우선 된장향이나 보통의 항정수육에 들어가는 월계수 향은 나지 않는다. 마늘, 양파 정도로 끓였거나 쪄서 만든 느낌이 들 정도로 고기 본연의 향이 살아있다. 좋은 고기를 쓰기 때문에 굳이 불필요한 재료들을 넣지 않고도 이 정도 퀄리티의 고기를 만든 것 같다.
때문에 고기를 씹으면 씹을수록 본연의 향이 잔뜩 올라온다. '아 내가 돼지고기를 씹고 있구나'라는 뿌듯함이 밀려올 정도로 고기 퀄리티가 상당하다. 항정살이기 때문에 씹는 걸 즐길 겨를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럽다.
끝맛에 약간의 달콤함도 있다. 아마도 굳이 달콤함을 첨가한 것은 아닐 테고 고기 자체의 질이 워낙 좋기 때문에 그 고기의 육즙이 전해주는 달콤함일 것이다. 그만큼 질 좋은 고기로 훌륭한 제육(수육)을 만들어낸 것은 요리사가 얼마나 이 고기에 심혈을 다했는지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정통 보쌈이 아니다 보니 김치는 무김치로 대체했다. 무김치는 평범한 편이다. 아마 그날 아침에 담근 것 같다. 무의 쓴맛이 남아있지만, 고춧가루가 상당히 맛있다는 게 느껴진다. 매콤하면서도 고추의 향이 살아있어서 김장김치에 들어가는 속김치 같다.
김치 자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김치까지 사용해서 만들기에는 제육의 취지와 어긋나지만 무김치를 통해 약간의 느끼함을 잡아줄 수 있어서 상당히 좋았다.
이외에도 좋은 무를 쓰는 것인지 하얀 무, 빨간 무가 정말 맛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것들인데 하얀 무는 달고 빨간 무는 짭조름하다. 이들과 같이 먹어도 고기의 맛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제육에 진심인 집이 아닌가 싶다.
욕심쟁이는 모든류의 순면을 먹어보고 싶어 진다. 그래서 모든 순면을 시켰다.
서령 순면은 평양냉면이다. 국물이 깊다. 소육수가 아닐까 싶은데 냉면 전문가는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메밀면이라 먹기도 편하다. 소주가 당기는 날에는 이 국물이 적합하다. 소주 안주로 먹으려면 서령 순면이 딱이다.
가끔 자극적인 맛이 당길 때는 비빔 순면이 최고다. 한 입 먹고 멈출 수가 없는 맛이다. 비빔장이 어떤 맛인지 궁금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 안에 담긴 장조림 같은 한우고기가 식감을 더해준다. 멈출 수 없는 맛이다.
들기름 순면은 웃음이 나온다. 좋은 들기름인 게 분명하다. 메뉴 설명에는 '갓 짜낸' 들기름이라고 돼있는데 이 정도면 갓 짜낸 걸 넘어서 그냥 지금 앞에서 만든 들기름인 것 같다. 들기름 순면으로 유명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들깨향이 물씬 난다. 여기에 항정 제육을 올려 먹는다? 그럼 정말 완벽하다.
이 집의 명물은 '짜배기'다. 소주에 얼음을 타서 먹는 건데, 성시경과 신동엽이 '먹을텐데'에서 소고기와 함께 이렇게 먹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이 집은 짜배기를 아예 메뉴로 판다. 물어봤더니 참이슬 25도짜리를 얼음과 함께 가득 담아서 주는 거라고 하셨다. 정말 넘칠 정도로 잔에 담겨서 나온다.
이 짜배기와 순면을 같이 먹으면 온몸에 피가 흐르는 기분이다. 소주를 싫어하는 사람도 얼음에 타서 먹는 이 짜배기는 싫어하지 않게 만든다.
배를 잔뜩 불리고 나오면 남대문 시장 쪽으로 가도 되고 서울역 쪽으로 가도 된다. 맛있는 디저트가 있는 카페들도 곳곳에 있고 2차로 갈 수 있는 식당도 몇 군데 있다.
서령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러 가지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화도에서 영업종료 소식을 듣고 슬퍼했던 많은 주민들이 언젠간 시간을 내서 남대문까지 올 수 있다면 그때와 같은 맛일지 물어보고 싶다. 어쩌면 더 맛있어졌을지도.
남대문 복판에서 찾은 항정살 수육집, 서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