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돔베고기는 참 꾸밈이 없는 음식 중 하나다. 재료를 있는 그대로 내놓는 수준이다. 별다른 양념 없이 삶아서 소금과 찍어 먹는 정도이니.
그런 돔베고기를 재해석한 맛집이 있다. 돔베고기의 재해석만으로 10년 가까이 제주 서쪽을 '재패'했다고 말하고 싶은 식당, 슬슬슬로우다.
이 집은 예전에 유명했던 프로그램인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왔던 가게다. 당시 아기자기한 소품과 독특한 라면 맛으로 입소문을 탔는데, 지금은 그때 방송에 나왔던 가게와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 (다행히 두 곳 다 가봤기에 비교가 가능했다.)
과거 슬슬슬로우는 월정리 해변가에 있었다. 지금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차로 가야만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예전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예약도 생겼다. 웨이팅이 있다면 안쪽에 대기명단을 적고 나중에 다시 와서 먹는 그런 구조다. 하지만 브레이크타임이 없기 때문에 시간대를 잘 골라서 오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제주시 구좌읍 슬슬슬로우 메뉴판
이 집의 특색 있는 메뉴는 당연히 '돔베라면'이다. 이 돔베라면은 말 그대로 돔베고기와 라면을 합친 요리다. 돔베땡초김밥은 꽤 오래전에 먹어봤어서 기억이 흐릿하다. 그럼 기억에 남는 맛은 아니었으니 패스. 돔베고기에 미친 나는 돔베고기 조금까지 시켰다.
이 집은 음식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우선 사장님이 직접 만들고 판매하는 티셔츠, 작은 소품 등이 진열돼 있다. 사장님이 원목 쪽에도 조예가 있으신 것 같다. 내부 인테리어도 기존보다 훨씬 넓고 깔끔해졌다. 약간 옛날 한국의 것들이 곳곳에 보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나쁘지 않았다. 기존 인테리어가 뭔가 바닷가 한복판에 있는 숨은 식당에서 아늑하게 밥을 먹는 느낌이라면 지금 식당은 숲 한복판에서 여유를 즐기며 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메뉴는 시키면 금방 나온다. 사장님 혼자서 조리하고 서빙까지 다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메뉴가 라면이다 보니 금방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이제부터 고기의 시간이다.
제주시 구좌읍 슬슬슬로우 돔베고기 조금
돔베고기 라면과 돔베고기가 있지만, 돔베고기 자체를 먼저 평가하자면 굉장히 독특하다. 한 번도 이런 돔베고기를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일도 없고 이 집이 아니면 먹기 힘든 돔베고기다.
맛이 없거나 이상하거나 특이한 게 아니라 맛있는데 돔베고기 같지 않다. 오히려 구워 나온 삼겹살 같은 느낌이다.
그 이유는 불향에 있다. 겉으로만 봐도 토치로 구운 느낌이 나는데, 아마도 삶은 고기를 토치에 한 번 지진 것 같다.
그래서 겉바속촉이 느껴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느낌은 아니다. 불향이 나서 독특한 맛이긴 한데 토치 탓에 육즙이 날아가서 그런지 고기가 딱딱한 편이다. 그래서 더 삼겹살 같은 느낌이 난다.
삼겹살 중에서도 육즙이 가득한 삼겹살보다는 바짝 구워서 나온 삼겹살을 먹는 식감이랑 비슷하다. 딱딱해서 못 씹을 정도는 아니고 다른 오겹살 돔베고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딱딱하다는 편이다.
통상 돔베고기는 먹으면 녹아 없어질 정도로 부드럽지만, 이 집의 돔베고기는 계속 씹으면서 고기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라면 장점이 돋보인다.
가장 큰 장점은 풍미다. 별다른 재료 없이 삶았기 때문에 자칫 돼지잡내가 날 수 있는 걸 토치로 구워서 육향으로 변모시킨 것 같다. 씹을수록 맛이 더 느껴지고 풍미가 강하게 와서, 처음 먹을 때보다 뒷부분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고기다.
제주시 구좌읍 슬슬슬로우 돔베고기 라면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고기보다는 라면이라고 생각한다.
돔베라면은 예술이다. 솔직히 돔베고기 조금보다 돔베고기 라면만 시키는 걸 추천하고 싶다. 어차피 돔베고기 라면 속에 돔베고기가 들어가 있으니.
이 집의 라면에서는 고추기름의 매콤함이 첫 포인트로 다가온다. 향신료의 향도 살짝 느껴지고 팔각의 냄새도 나서 중화풍이 느껴진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불을 살짝 입힌 느낌도.
일본의 차슈라멘이 생각나는 비주얼이지만 맛 자체는 사뭇 다르다. 이 세상에 이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그런 걸출한 라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그릇 안에 여러 요리가 담겼음에도 조화를 이룬 느낌이라서 먹을수록 즐거운 맛이다. 그리고 계속 생각이 나고 입에 맴돈다.
라면이 메뉴판 제일 위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배부르게 먹고 고개를 들면 주변 풍경들이 소화를 돕는다. 바로 나가기보단 잠시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문을 열고 나오면 빌딩 하나 없는 자연도 있다. 건물 2층으로 숙박시설을 준비 중인 것 같던데 은근히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