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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Jul 20. 2020

식인과 광인 사이에서 - '광인일기', 루쉰

1918년 4월,


루쉰에 대하여


 루쉰은 20세기 초 중국 작가이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로 주위 국가들로 인해 급격하게 몰락하던 시대였다. 같은 시대의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그가 전하는 말이 당시 조선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100개가 넘는 필명으로 단편 소설 몇편과 많은 잡문을 남겼다. 그만큼 당시에는 작품을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을까, 혹은 정부의 탄압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단편 소설을 좋아하는 작가의 특징일까. 그렇지만 그의 단편에서도 장편 못지 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루쉰은 많은 작품들에서 '과거 관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사상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기존의 유교적 관점 - 황제에게 복종하고 관리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삶 - 을 버리고,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해야 하며, 더 이상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가치가 아닌,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망리다.


 하지만 루쉰의 작품 속 주장은 19세기 말의 서양의 파괴적 철학 - 니체로 대표되는 - 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서양에서의 파괴가 일방적이고 직선적이라면, 루쉰의 파괴는 원형적이고 순환적이었다. 그런 주장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 바로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소설 '광인일기' 이다. 





광인은 누구인가


나는 역사책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역사 책에는 연대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저 비뚤비뚤하게 '인의 도덕'이란 몇 자만 씌어 있었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제서야 글자 사이에 온통 '식인'이란 두 글자가 빽빽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3장 중. 

 1918년 5월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미친 사람인 '광인'의 '일기'가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광인'은 '식인' 과 대조적인 인물로, '식인'은 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이며, '광인'은 그런 식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식인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광인이라 여기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인공이야말로 광인이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들 역시 식인을 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자신의 여동생이 없어진 과거의 사실도 사실은 식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당시에 실재로 식인이 있었나 궁금해졌다. 작품 설명에는 실제로 루쉰이 살았던 시기까지 식인이 종종 벌어졌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식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장면은 사람들이 식인을 하는 행위를 목격하는게 아닌, 역사 책을 들여보면서이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식인'은 과거 사람들의 학문을 해석하며 사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닐까 싶었다. 사서삼경을 외우고, 그 속에 담긴 뜻만 해석하기 위해 삶을 바쳤던 학자들의 모습. 실제로 공자가 말한 '인'이 아닌,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만 뜯어서 '인'을 만드는 모습이, 마치 과거 공자의 몸 일부를 떼어 먹는것과 비슷하기에 식인을 쓴 것은 아닐까. 




개과천선하시오. 그것도 진심에서부터. 장차 세상은 사람을 잡아먹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 10장 중


 이러한 '식인'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세상은 더 이상 식인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식인이라는 풍습이 없어질 것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유교 경전 해석에 매달린 학자들이 머무를 자리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루쉰은 젊었을 적에 일본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생활에서 이미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한 서양과, 발전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아직도 유교 경전에 머무르고 있는 자국에 대한 생각을 곰곰히 했던게 아닐까 싶다.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자의 형제


 큰 형님께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면서 공교롭게 누이동생이 죽었다. 형님이 나 몰래 누이동생의 살점을 밥이나 반찬에 섞어 나에게 먹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살점을 먹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 12장 중.

 

그렇게 '식인'을 비판하던 광인은 문득 자신 역시 '식인'의 굴레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 자신의 여동생이 없어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깨달음, 그것이 광인의 상상일지, 진짜 사실일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전개를 보여준다.


 바로 이 표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부모에게서 일부를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다. 자신이 아무리 부모와 달라지려 스스로를 바꾼다 할 지라도, 그 속에 흐르는 피까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쉰은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한다. 아무리 스스로 깨닫고 파괴한다 할 지라도, 그 일부를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다는 모습, 그건 상당히 원형적인 느낌이었다.  




아직도 사람 고기를 못 먹어본 어린이가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 13장, 마지막 문장.

 

그렇다면 '식인'에서 벗어날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아이들이다. 아직 식인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아직 기존 유교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만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루쉰이 생각한 진정한 희망은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기 자식을 누구나 걷는 '식인'의 길이 아닌 '광인'의 길로 기꺼이 걷게 할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세상의 거대한 시스템에 순응해서 들어가지 말고, 자신만의 고독한 광야를 걸어가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정말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을까? 또한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부모의 판단대로 아이의 진로를 정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식인'이 된 '광인'


친구가 고생 끝에 먼 길을 왔지만 병은 벌써 다 나았고 지금은 모 지방으로 가서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 0장 중.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오면, 광인이었던 친구의 동생은 병이 나아서 직장을 구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끝내 '광인'은 '식인'의 세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식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이었을까, 나이가 들며 현실을 깨닫고 세상에 순응하게 된 걸까, 어찌 되었던 씁쓸한 현실적인 결말처럼 느껴지는 건 변함없었다.


 아니면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 작품의 가장 앞부분 - 광인일기가 시작하기 전 부분 - 이 백화문으로 적혀있기에 그럴 수도 있다. '광인'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가장 앞쪽 부분은 지식인들이 주로 쓴 '백화문'으로 적혀 있고, '광인'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은 대중이 주로 쓰는 '문언문'으로 적었다고 한다. 백화문의 세계에서 광인은 끝내 식인이 되었지만, 문언문의 세계에서 광인은 식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파괴한다는 명분 아래,


문화대혁명 : '파사구' 를 중심으로,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관습을 타파하자는 운동, 마오 쩌둥, 1966~1976


 기존의 관습을 타파하려는 루쉰의 생각은 이후 중국 정치인들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오 쩌둥은 루쉰의 작품을 중국 내에서 굉장히 높은 위치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거대 권력은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는 건지, 결국 타파는 문화대혁명이란 거대한 파괴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비판적 파괴가 아닌, 무조건적인 파괴로 향했던 것이다.


 분명 루쉰의 작품 속 일부만 떼서 인용하면, 파괴는 정당화된다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문학적 작품 속에서, 그 흐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는게 아닐까. 과연 루쉰은 스스로 생각한 파괴가 문화대혁명까지 이어질 수 있을거라 상상할 수 있었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책임은 마오 쩌둥에게 있다고 할 지라도 말이다.

 



식인과 광인 사이에서


 작품을 덮고 나니, 드넓은 세상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게 과연 편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나는 타인과 다른 사람이 되고자 애써왔다. 주위 사람들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건 쉽지만 재미가 없게 느껴졌다. 스스로 가진 편견, 고정관념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의심하는 게 스스로에게는 더 잘 맞는 일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식인과 광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번 광인이 되고 나면 식인으로 돌아가기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언젠가 광인처럼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날이 오면, 과거 자신의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식인과 광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음에는 쿵이지와 약, 고향과 흰 빛을 묶어서 차례대로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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