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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Sep 01. 2020

잘못된 지성과 의지로는, 알을 깰 수 없다.

아q정전을 읽고, 데미안과 겹쳐보며,

 최근에 루쉰의 단편 소설인 '아q정전'을 읽었다. 중학교 때 세계문학 단편선에서 한 번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아q가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건 이번에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1. 아q의 의미

2. 아q정전

3. 아q는 뭐가 문제인가?

4. 아q를 보며 드는 생각들.




1. 아q의 의미


하지만 내 문장은 문체가 마치 '수레나 끌고 된장이나 파는 자' 들이 사용하는 말처럼 비속한 까닭에 감히 '본전'이란 명칭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소설가들이 했던 말, 즉 "쓸데없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정전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에서 '정전'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본 편의 제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 1장 중


 루쉰은 1장을 할애해서 주인공 아q에게 왜 정전을 써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정전'인 이유는 '열전'이라 하기엔 아q가 너무 보잘것없고, '별전'이라 하기엔 아q가 아무런 업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q라는 인물의 근원에 대한 설명이란 의미에서 '본전'이라 쓰려하는데, 비속한 까닭에 '정전'이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아q가 영웅적인 인물은 아니며 오히려 아주 보잘것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위할 수 있는 것은 '아(阿)' 자만은 매우 정확하다는 점이다. 절대로 부회(附會) 했다거나 어디서 따온 것이 아니므로 이것만은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신할 수 있다.

 - 1장 중


 한편 아q의 이름도 기원도 설명해준다. 이름의 '아'는 언덕, 물가, 혹은 아부하다 라는 뜻을 가진 한자라고 나온다. 강자에게 아부하는 일반적인 인간 군상을 보여준 것일까. q는 변발을 해서 머리가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고 한다.




2. 아q의 일생


"아q, 이건 애가 어른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어서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말해봐."
 아q는 두 손으로 변발을 움켜쥔 채 머리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버러지를 때린다고 하면 어떨까? 나는 버러지라고. 이래도 안 놔줄거야?"

- 2장 중


 아q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독특한 '정신승리법'이다. 현실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스스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낮춰서 이기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맞았으면, 때린 사람이 아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 자신을 때렸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낮추고, 동시에 자신은 그런 걸 감내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방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기막힌 방법일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 겪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을 이 방법으로 해결하면 어떨까? 상사가 자신을 혼내면 그 상사가 모자란 인물이라 생각하고, 타인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타인이 그만큼 멍청하다고 여기면 되는 게 아닌가? 이보다 쉽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어딨겠는가?




아q는 처음에는 적이 실망했다가 나중에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젠장 꼴불견인 왕후란 놈도 이가 저렇게 많은데 자신은 적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좀 큰 것 몇 마리를 잡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 3장 중


 또한 아q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아주 분개하며 행동한다. 작품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왕후라는 놈이 자신보다 더 큰 이를 갖고 있는 걸 참지 못한다. 보잘것없는 저 놈이 나보다 '이'라고 많은 걸 참을 수 없기에 그는 분하게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날 밤만은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이날 따라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훨씬 더 미끄러운 것 같았다. 비구니의 얼굴에서 분이라도 묻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닿아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 4장 중


 그렇게 정신승리법으로 살아가던 아q에게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비구니를 희롱하고 돌아온 아q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다. 비구니의 얼굴에 닿았던 자신의 손에 남아있는 감각 때문에, 아q는 비로소 여자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모든 걸 이길 수 있었던 정신승리법의 세계에서 현실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q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부잣집 하녀에게 집적대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마을에서 배척을 당한다. 그 일 이전에는 근근이 마을 사람들이 주는 일을 하며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위한 행동 하나로 그는 먹고 살 방법조차 잃어버렸다.




아q는 길거리를 헤매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낯익은 술집에 역시 낯익은 만두가 보였다. 하지만 그는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잠시 머뭇거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말조차 꺼내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 5장 중


 아q는 배고픔을 참다못해 구걸을 해서라도 먹고살려고 한다. 그가 자주 방문하던 만두 집 앞에서 몸을 돌리는 모습은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양심이었을까. 그러나 더 심해진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절에서 무 몇 개를 훔치다가 비구니에게 걸려 도망간다. 도망치며 아q는 성으로 들어가야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주인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까지 붙여왔다.
 "오, 아q, 자네 돌아왔군!"
"돌아왔소!"
"갑부가 된 모양인데 자네 어디서..."
"성내에 갔었더랬소!"

- 6장 중

 

 며칠 마을에서 사라졌던 아q는 갑자기 수많은 현금을 갖고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변한 아q를 바라보며 의아해하면서도 그 앞에 굽신거린다. 그럴수록 아q는 더욱 기고만장해지는데, 곧 아q가 성 내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 성 밖에서 훔친 물건을 옮기는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혁명도 나쁘지는 않지." 아q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조무래기들을 모조리 엎어버려야 한다고. 가증스런 놈들. 원한이 사무친다! 나? 그야 물론 혁명당에 투항해야지."

 - 7장 중


 그렇게 다시 바닥이 된 아q한테 혁명당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성안을 장악한 혁명당은 곧 마을까지 들이닥칠 모양이었다. 혁명이 일어나면 아q는 자신이 평소에 받은 멸시를 모두 돌려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자신만의 상상 속에 빠지게 된다.




아q는 길모퉁이에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흰 투구에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짜오 가에서 연신 상자와 가구들을 끌어내고 있었고 수제 마누라의 문간 침대까지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 8장 중


 그러나 혁명당원들은 이미 마을까지 도착했고, 아q는 일부가 부자 짜오 집을 터는 상황을 목격한다. 아q가 정말로 혁명을 원했더라면 참가해야만 했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허튼 수작 마라. 이제 와서 이야기한들 때는 이미 늦었다. 지금 네놈의 패거리는 어디 있지?"
"뭐라고요?"
 "그날 밤 짜오 가를 약탈했던 그놈들 말이다."
 "저에게는 기별조차 없이 자기들끼리만 가져갔는뎁쇼."
 아q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갔느냐 말이야? 순순히 불면 풀어줄 테다."
 영감쟁이는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몰라요. 제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 9장 중


 누군가 아q를 약탈의 주동이라 밀고해서 아q는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생각해야 할 때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고,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상상해서 대답한다. 몇 번의 재판 과정에서 글자를 모르는 아q는 점점 궁지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눈빛을 발견했다.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 눈빛은 그의 말을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육신 이외의 것마저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영원히 뒤쫓아오고 있지 않는가?
 눈빛은 한데 어우러져 영혼마저 물어뜯는 것 같았다.
'사람 살려!'
 그러나 아q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9장 중


 결국 아q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장에 선다. 그는 거기서 자신을 쫓아오는 무서운 눈빛을 발견한다. 마지막 단말마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죽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 아q는 뭐가 문제인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q의 삶에 좋은 일은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다가 잠시 권세를 가졌을 뿐, 곧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왜 아q는 그런 운명을 겪어야만 했는가?


 1. 정신승리법

 아q의 정신승리법은 자신 내부에서는 합리화 방법으로 동작할 수 있어도 현실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자신을 높이는게 아닌, 타인을 깎으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건 실제 삶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또한 그 우월감으로 인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되어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렇기에 아q는 몰락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q는 왜 정신승리법을 행할 수밖에 없었는가?


2. 거대한 삶 앞에서

어쩌면 아q가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때 배우지 못했기 때문 일 질도 모른다. 그런 정신승리법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가르쳐 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아q의 삶은 조금이나마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q의 삶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도저히 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이 사라지고 무력감이 가득 해지는 순간, 아q는 정신승리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씁쓸하게도 오늘날 상황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3. 생각과 행동을 반대로,

 한편으론 아q는 가만히 있었더라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거나, 혁명을 중얼거리고 다니지 않거나, 재판에서 잠잠히 앉아있는 것보단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어필했더라면. 작품에서 아q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의 반대로 했다면, 아q는 어쩌면 행복한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상황 판단 능력 역시 배워야 생기는 게 아닐까. 혹은 타인의 삶을 옆에서 참견하기는 쉽지만 막상 그게 자신 앞에 닥치면 다루기 어려운 것처럼, 아q를 바라보면서 훈계하기는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4. 아q를 보며 드는 생각들.


"저.....저는 글씨를 모르는뎁쇼." 붓을 쥔 아q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좋을 대로 하려무나. 동그라미를 그려도 돼!" 그렇게 하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그때 그 자가 종이를 땅바닥에 깔아주었고 아q는 엎드린 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원을 그렸다. 그들이 비웃을까 봐 최대한 둥글게 그리려 했지만 묵직한 붓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이어붙이려는 순간 그만 붓이 밖으로 튕겨 종이 위의 원은 호박씨같이 되고 말았다.

- 9장 중 


 아q는 글자를 모르기에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문서를 읽지 못하고,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동그라미를 똑바로 그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자신의 죄를 알 수 있는 기초조차 배우지 못했다는 게 죄가 될 수 있을까, 


이날 밤에 거인 나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파총과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장물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던 반면 파총은 공개처형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 9장 중

   

 한편 작품 속 혁명 이후에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거인 나리는 그대로 돈을 유지했고, 그 위의 권력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루쉰은 당대의 신해혁명이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들고 볶아보았자, 결국 민중들의 삶을 바꾸진 못했기에 실패한 혁명이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아q와 '데미안' 속 싱클레어,


 아q정전을 덮고 나서도, 아q의 행동과 사상은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그만큼 아q의 행동이 인상 깊기 때문일까. 


 아q는 일방적인 몰락 방향은, 헤세의 '데미안' 속 싱클레어와 온전히 반대 모습을 보여준다. 싱클레어가 올바른 지성과 의지로, 사유와 행동으로 완성된 인간을 향해 나아갔다면, 아q는 잘못된 사유와 행동으로 몰락한 인간으로 나아간다.


 싱클레어가 올바른 지성과 의지로 자신의 알을 깨고 세계로 나갔다면, 아q는 잘못된 지성과 의지로 알을 깨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서 죽은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아q정전이 오늘날에도 읽히는 까닭은, 그의 정신승리법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행동하지 않고 정신에서만 모든 걸 해결하려는 태도, 현실 앞에서 자신을 바꾸는 태도, 그걸 경계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아q와 싱클레어를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둘 중에 누가 더 자신에게 설득적으로 들리는지는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 택할 수 있는 건 극단의 성장과 몰락 사이, 한 부분이 아닐까. 우리는 중간에서 양 쪽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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