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학 3 논문 내용 정리,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자신의 철학을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글이다. 그렇지만 기존 논문들하고는 구조가 달라서 논문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내용을 잘 짜 맞춰보면 비로소 니체가 하고자 했던 말이 표면에 드러나며, 이번에 읽은 3 논문의 제목은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1. 기존 도덕의 계보학적 분석
2. '금욕적 이상'의 의미와 한계
3. '금욕적 이상'의 대안
4. 현실성이 있는가?
계보학은 가계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한 가족에서 위 세대로 올라가며 기원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도덕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였는가? 평범하게 자신의 앞 세대 철학의 문제를 찾기보다는 훨씬 넓은 시야로 접근하여 도덕의 근원에서 발생한 오류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미 니체는 기존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제3 논문에서의 '금욕적 이상'은 예술, 철학, 종교에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다. 바그너를 인용한 예술과, 쇼펜하우어를 인용한 철학, 그리고 기독교 모두 '금욕적 이상'을 목표로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셋 중에 예술이 가장 먼저 나오는 건 인간이 예술의 본질을 깨닫기 전부터 이미 예술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대화편이 쓰이기 한참 전부터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전부터 춤과 노래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았고, 단지 시간이 흐르며 예술에서 철학으로 표현 방법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한 이성 기반의 형이상학'이라 말한다. 플라톤은 인간을 몸과 정신, 감성과 이성으로 나눴고, 오로지 정신과 이성을 통해서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몸과 감각은 진리를 찾는데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진정한 철학자, 즉 쇼펜하우어처럼 진정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자,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를 지니고, 홀로 설 줄 알며, 앞사람과 윗사람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는 강철 같은 눈빛을 지닌 남자이자 기사 금욕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142
그러한 이상이 '금욕적'인 건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과 감각을 억누른 채 이성을 통해서만 추구했던 목표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스스로 인정한 위대한 스승 쇼펜하우어조차 '금욕적 이상'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성으로부터 지성과 의지를 분리시키기는 했지만, 끝내 지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처음에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리고 이것 때문에 바그너의 초기와 후기의 미학적 신념 사이에 완전한 이론적 모순이 생겨나는 정도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 p.142
'금욕적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바그너의 초기 작품들은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작품들이었지만, 후기 작품들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다.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관념과 이성으로 왜곡된 세상을 그려냈다는 말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는 단지 바그너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였다.
금욕적 사제는 그러한 이상에 자신의 신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힘이며 자신의 관심까지도 포함시켰다.
- p. 163
시간이 흐르며 철학은 곧 종교가 되었고,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던 철학자들은 '금욕적 사제'가 되었다. 비록 추구하는 방향은 같을 지라도 홀로 진리를 탐구하던 철학자들과는 달리, 사제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신도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거 철학자들은 왜 '금욕적 이상'을 신봉했는가? 니체는 '인간 고통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라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 나선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진정한 진리를 얻은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금욕적 이상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고통을 없애지 못한다. 만약 금욕적 이상이 인간의 고통을 없앨 수 있었다면, 왜 인간은 여전히 고통받으며 살았는가? 또한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삶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가?라고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금욕적 사제가 정녕 의사란 말인가? 그도 자신을 '구원자'라 느끼고, '구원자'로 존경받기를 원한다 해도, 그를 의사라고 부르는 것을 왜 용납할 수 없는지 우리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는 단지 고통 그 자체와 싸우고, 고통 받는 자의 불쾌와 싸울 뿐이지, 그 원인이나 본래의 병적 상태와 싸우는 것은 아니다.
- p.182
결국 '금욕적 사제'는 고통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단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는 역할 밖에는 못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잡초의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잎이 계속 자라듯이, 고통의 근본 원인을 뽑지 않으면 고통은 잠시 사라질 뿐 다시 자라는 것과 같다.
그것이 그러한 치료 체계가 인간을 개선시켰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겠다. '개선시키다'는 말이 나의 경우에 무슨 뜻인지 덧붙이고자 할 뿐이다. 내게는 이 말이 '길들인', '약화된', '사기를 잃은', '세련된', '유약해진', '기가 죽은'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 p.201
게다가 '금욕적 이상'의 치료법은 인간을 더욱 나약하게 만든다.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개인의 고독을 포기하고 자신의 시선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힘을 스스로 약화시킨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 - p.230
니체는 그렇게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은 결국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거라 말했다. 인간이 과거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이 '무'와 같다는 걸 깨다는 순간, 인간은 거대한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라는 예언으로 논문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금욕적 이상'이 아닌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 본연의 내면적 가치를 창조하고 이를 따르는 삶이다. 외부의 기준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라는 말이다.
니체는 비록 지금의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으리라 믿었을지라도, 언젠가는 구원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지닌 '힘에의 의지' 때문이며, 인간 의지를 잘못된 방향(금욕적 이상을 신봉하는)이 아닌 올바른 방향(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으로 발현하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본연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니체처럼 도덕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서 인간이 최초로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인간이 그 시점에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했다면, 인간은 바로 본연적인 완성을 이룰 수 있었을까?
분명히 고대 그리스에도 플라톤과 대립해서 니체처럼 사유한 철학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던 이유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철학들을 시도함으로써 비로소 그 방향이 옳지 못한 방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니체의 주장이 가치를 갖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인생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과, 인간이 죽기 직전에 인생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의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또 다른 고찰은, 과연 니체가 말한 자기완성의 길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금욕적 이상'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니체가 말한 자기완성으로 고통을 없애는 길은 쉬운가? 그게 정말로 가능한 방향이며 자연스러운 일인가? 만일 그랬다면, 왜 니체가 죽고도 오랜 시간 동안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이 쉽다고 하는 인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칸트가 처음으로 세계와 자신을 분리하여 인식함으로써 인간 이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쇼펜하우어는 다시 지성과 의지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니체는 진정으로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했을 때의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니체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미 대단한 철학자다. 하지만 단순히 철학뿐만이 아니라 예술, 종교의 다양한 분야까지 기존 방법의 문제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통찰력과 영향력에서 니체는 진정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