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로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 소통과 언어의 본질을 묻다
‘문자와로서로 사맛디 아이 할세(文字와로서로 斯末디 아니할세)’
훈민정음 서문 속 한 구절이다.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는 뜻.
이 한 문장은 한글이 왜 창제되었는지를 단박에 알려준다.
소통이 되지 않았던 백성들의 삶, 그 고단함, 그 침묵 속 고립을 끊기 위한 위대한 언어 혁명이 바로 훈민정음의 시작이었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 원리와 철학이 기록된 문자다.
문자가 신의 영역이던 시대, 문자로부터 배제당했던 백성을 위해 ‘임금이 스스로 만든 글’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문자로도, 정신으로도 독창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오랫동안 지켜왔고, 외세의 침략을 겪었으나 스스로 침략전쟁을 일으킨 적은 거의 없었다.
고유한 언어와 예술, 철학을 만들어 온 ‘순한 나라’였던 셈이다.
그러나 ‘독창성’은 언제나 바로 인정받지 못한다.
세상이 낯선 것에 손뼉을 쳐주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했다.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했지만, 죽은 후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색채, 그의 붓놀림은 그 시대에선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던 셈이다.
지금은 찬란한 독창성으로 남았지만, 그 시대엔 외면받은 말들이었다.
이처럼 독창성은 종종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언젠가 인류를 울리는 울림이 된다.
그렇기에 언어는 단지 소리나 문자가 아니다.
언어는 존재의 결, 감정의 색채, 생각의 구조를 담는 가장 정밀한 도구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AI 번역기가 다 해주는데, 굳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겉으론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아무리 AI가 발달했다 한들, ‘즉석 번역’은 아직 ‘즉석 공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언어는 단순한 뜻의 전달이 아니라, 뉘앙스와 숨결, 감정의 떨림이 함께 전해져야 비로소 ‘소통’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나라,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도 종종 서로를 오해한다.
부부 간에도, 친구 간에도, 직장 동료 간에도.
나에겐 나만의 언어가 있다.
내가 쓰는 말투, 내가 선택하는 단어, 내 감정을 실어 말하는 방식.
이것이 바로 나다.
이 언어는 내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전하는 도구이자,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다.
AI는 이 통로를 빠르게 만들어주지만, 그 끝에 담긴 내 진심까지는 아직 옮기지 못한다.
기술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부분.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배워야 하고, 더 나은 소통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이 말하듯,
“문자와로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우리는 언제나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통하려는 노력’으로 언어를 가꾸고, 감정을 배우고,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