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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로드라마 Jan 25. 2024

어쩌다 투병일기 5-항암시작

견디다 보면 이것도 끝나겠지만....

 1월 15 일 오전 9시부터 항암주사를 맞았다. 총 3개의  약(영어로 줄여서 TAC)을 차례대로 맞는데  TAC는 다른 항암약에 비해  독하고 부작용이 중간에 발생할 수 있어 천천히 맞기로 했다.

 항암을 맞기 전 오른쪽 가슴 위쪽의 정맥관에 포트를 삽입했다. 보다 안전하게 주사를 맞기 위한 시술이었다. 나는 혈관도 약하고 숨어있어 평소 주사 맞기가 힘들었었는데 그게 더 낫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항암 횟수가 4회가 넘으면 대부분 포트를 삽입한단다.


 3개의 주사를 다 맞고 나니 오후 2시 30분이 되었다. 대략 5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큰 부작용은 없었지만 화장실에 자주 갔고, 술에 취한 기분과 잠이 쏟아졌다. 항암 하며 가장 중요하다던  영양교육까지 듣고 우리 부부는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내 옆에서 기다리며 허기졌을 남편에게 점심을 먹자고 했다. 병원식당 중 가장 건강한 밥을 팔 것 같은 곳을 찾아 앉았고, 나는 나물돌솥밭을 남편은 낙지불고기뚝배기를 먹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배고팠던 남편에게 내 밥 절반을 덜어줬다. 여러 가지 나물 색이 예쁘고 맛있어 보였지만 무(無) 맛,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경험해보지 않았던 항암에 대한 두려움, 유방암 카페와 블로그에서 읽어왔던 항암부작용들. 그 버거움에서 조금 벗어난 느낌이었다. 무사히 3종 항암제를 맞았으니.

 그러나 기적은 없다. 현실은 현실이지 드라마가 아니었다.


 밥을 먹고 나와 심장초음파를 촬영하니 4시가 조금 넘었다. 그때 갑작스레 통증이 시작됐다. 복통과 멀미. 어지러웠고 쓰러질 것 같았다. 저혈압쇼크 같은 느낌. 얼굴이 허옇게 질리고 식은땀이 났다. 남편과 서둘러 차에 탔고, 집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난 또 기도했다. 하지만 모든 게 소용없었다. 괴로웠다. 다만 남편에게 '몇 분 남았어?'라고 얼마나 재촉했는지 모른다. 버스전용프리인 구간이 나와 집에 예상시간 보다 일찍 도착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초췌한 모습에 당황할 아이들. 나는 서둘러 화장실을 갔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누웠다. 남편이 누룽지라도 먹으라며 죽을 끓였는데 두 숟가락 먹고 먹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먹으라는 남편, 남편의 걱정을 뒤로하고  난 약을 챙겨 먹고 침대에 누워 일어날 수 없었다.


 눈 뜨니 다행히 다음 날이었다. 오늘은 어떨까? 남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국을 끓이고 잡곡밥을 해놓고 출근을 했다. 잡곡밥이 꺼끌꺼끌, 남편에게 백미밥을 해달라고 해야겠다 생각했다. 밥은 넘어가지  않았지만 콩나물국은 깔끔하고 시원해 속을 달래줬다. 약을 먹고 거실소파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시간을 보냈고 나는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평소와 같았다.

 '아이들 점심은 뭘 시켜줄까?' 직접 해주지는 못하겠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 내가 먹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하려고 애썼다.  나는 먹고 싶은 게 없었고 아이들은 각자 좋아할 만한 덮밥종류를 배달시켰다.

'아마 방학까지는 이렇게 지내겠다'라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늘 지쳐 누워있는 엄마를 낯설게 느끼다가 때론 지겨운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아이들과 평범하게 보냈던 시간이 소중하다


통증은 울렁거림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주말부터 찾아온 복통과 관절통에 처음 겪는 식은땀의 어지러움 '이런 게 항암이구나.'강한  공포가 느껴졌다.

앞으로 5번. 이런 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  어떤 반응이 새롭게 생기거나 아님  강도가 더 세질 수 있을 거다.

공포스러운 주말을 지나 월요일이 되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더 심한 근육통이 허리 쪽으로 심하게 옮겨 오고 복통과 설사까지 계속됐다. 지사제와 근육통약을 꾸준히 먹고 누워있기만 했다. 남편이 회사에 가고 아이들도 학원에 가고 혼자 있는데 눈물이 났다. 그냥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도 5월이면 항암치료가 종료된다. 수능시험을 끝낸 수험생처럼 해방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결과는 완벽해야 한다. 내 경우에는 실수로  omr카드를 밀려서 채우는 일은 절대 안 된다. 정신 잘 붙드러 매고 잘 풀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고통의 날이 반복되자, 내가 찾아간 곳은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였다. 재작년 시작된 폐소공포증이 원인이 된 공황장애로  진료를 받아온 곳이었다. 이번 항암치료를 받기 전 항암치료 시 바꿔야 할 약이 있거나 내 상황에 대해 상담을 하고 싶어 진료를 받아었다.


항암을 하기 전 진료를 받은 후 3주 만이다. 담당선생님과 상담을 하는데, 상담기록을 먼저 보셨는지

"힘들었죠?"하고 선생님이 묻자,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네. 생각보다 너무요."

내 입이 평소와 다르 게 대답했다.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안부를 묻거나 언니들이 물을 때 난 꽤 씩씩하게 말했다.

'난 명랑한 암환자가 될 거야!'라고 다짐했고 그걸 지키기 위해 '난 괜찮아, 괜찮다....'나 자신을 가스라이팅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의사 선생님이 '정말 힘들었겠어요.'하고 따뜻하게 말해주는데 꼭 안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감사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라고 시작했던 만화 캔디의 주제곡 [사진출처, naver]


J언니가 내게 그랬었다.

"울고 싶을 때는 그냥 우는 거야. 참지 말고.

나는 아팠을 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어. 울고 싶으면 그냥 펑펑 우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우는 일이 줄더라고."

언니가 보기에는 내가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슬픈 감정들을 솎아내듯 보였나 보다. 어쩌면 그랬는지 모른다. 내가 울면 언니들도 울고, 아이들은 불안할 테고, 남편은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아서 '울면 안 된다는 캔디의 정신'으로 버티려고만 했나 보다.  그래, 갑자기 슬퍼지면 이젠 울어보자. 명랑한  암환자도 울 수 있다!


그리고 통증은 9일 차에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야호,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지만 한 내 마음은 간사하여, 이럴 때만 감사할 줄 안다. 사실 내 고통의 시간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출애굽 하던 그 광야의 길고도 긴 시간에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었다. 나는 그걸 또 잊고 아프다고만 불평했다. 이겨낼 생각보다는 안 아프게 해달라고, 여기서 항암만 끝나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건 기도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기적일 뿐이었다. 기도에도 소통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비나이다 비나이나'마치 산신령께  은도끼를  빠트렸으니 금도끼로 달라고 떼쓰는 것처럼 보였다.

은도끼를 빠트렸으면 은도끼가 나올 것이고 금도끼를 빠트렸으면 금도끼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결과다.

 나는 잘 기다리면 된다. 바람이 불면 옷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고 걷고, 바다를 만나면 돌아가면 된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광야의 시간은 끝나고 젖과 꿀이 넘치는 시간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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