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에서 철원을 가는데 왜 동서울버스터미널이..
우프, 우프코리아, GW_111
세 번째 행선지는 철원에 있는 농장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강원도 철원으로 이동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안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영월에서 서울, 서울에서 철원과 같이 동서울 버스터미널을 이용해 이동하는 게 시간도 덜 걸리고 돈도 덜 들었다.
별 거 아닌 일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서울에는 발을 디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지낼 때의 나는 두렵고 불안하고 무력했다. 마냥 서울 탓을 할 수는 없지만, 서울의 탓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울을 겪을 만큼 겪어본 마냥 이렇게 서울 서울 거리는 건 좀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쭉 자라다가 서울에서는 단지 대학을 다니기만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굳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서 대학을 다녔을까?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많은 사람들에게도 서울에 가면 무엇이 됐든 간에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희소한 기회가 되었고, 그 귀한 기회가 내게는 주어졌기에 당연히 붙잡았다.
하지만 ‘좋아진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서울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좋음이 나에게도 좋은 것일까? 이런 의문은 뒤늦게야 들었다. 서울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권위였기 때문이다.
서울은 항상 옳았다. 굳이 서울까지 가서 대학에 다닌 것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선택이라기보다는 권위를 향해 마땅히 해야 할 복종에 가까웠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많은 것을 제공해주었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삶의 양식, 사고방식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맞출 것을 요구했다. 어느 부분에 있어선 한껏 무감해지길, 어느 부분에 있어선 한껏 민감해지길 요구했다. 이는 문명화된 노예제도 같았다. 요구는 폭력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따르게 되었다. 서울을 배회하고 있는 ‘다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중얼거림 때문이었다.
그 중얼거림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아서 처음에는 분명 듣기만 했었는데 어느샌가 나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울에서의 삶을 내 몸과 정신과 영혼에 익혔다. ‘다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중얼거림의 세력을 키우는데 작지만 확실하게 일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종은 편하지만 불편한 것이었다. 그럭저럭 살다가도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질문이 고장 난 형광등 마냥 멋대로 켜졌다 꺼졌다 했다.
잠깐잠깐 밝혀지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막연히 두렵고 불안하고 무력하게만 했다. 이 무력함을 벗어나고 싶어서, 나를 감싸고 있는 중얼거림을 벗어나고 싶어서, 어떤 삶이 내게 맞는 것인지 고민하기 이전에 이미 내 몸에 너무도 익어버린 서울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서 우프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듯 서울에 대해 피해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기만 할 뿐인 아주 짧은 시간도 서울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다시 중얼거리게 될 것 같았다.
서울이 괜히 밉다 보니 강원도에서 강원도 가는 데 서울을 찍고 가는 게 더 낫다는 것도 괜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서울의 탐욕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은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며 꾸역꾸역 강원도 안에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강원도에서 강원도를 가는데 서울을 찍고 가는 게 낫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교통 이용량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월에서 철원으로 갈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철원 터미널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나는 경기도 1호선 근처에 있는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보니 이런 풍경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출생 수 감소에 따라 입영 대상자의 수도 줄어든다는데.. 군인들이 줄어들어 버스 이용객이 줄어들면 지방 버스들은 어떻게 운영될지를 잠깐 생각했다.
비효율적이더라도 서울을 찍지 않고 이동한 것에, 강원도 내 교통 이용량을 조금이나마 늘린 것에 묘한 위안을 느끼며 철원 농장의 호스트님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