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라딘>의 흥행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관심은 곧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의 캐스팅 논란으로 이어졌다. 에리얼 역에 캐스팅된 인물은 바로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 기존 디즈니 팬들에겐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파격 캐스팅이었다. 이에 대해 여론은 둘로 갈렸다. '차별과 편견을 깨버릴 수 있는 좋은 현상이다'라는 긍정적 평가와 '내가 알던 에리얼은 흑인이 아니다'라는 비판 섞인 목소리, 이 둘은 온라인 상에서 큰 논쟁으로 번졌다. 이러한 논쟁에 대해 디즈니는 주인공 에리얼이 덴마크인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흑인이나 빨간 머리가 될 수도 있고, 이렇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캐스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라며 입장을 밝혔다.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가 캐스팅된 것이 불편하다면 그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뉘앙스가 다분히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디즈니의 팬도 아니고 인어공주에 관심도 없었지만 디즈니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란 불명예를 얻었다.
'여성은 왕이나 대통령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은 여성차별적인 발언인가? 확실히 여성차별적인 발언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아도 신라 시대엔 세 명의 여왕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떠한 과학적, 법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발언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성차별적 사상에 기초한다는 것에 그 누구도 이견을 가지진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 역에 배우 이요원, 드라마 '대물'에서 대통령 역에 배우 고현정의 캐스팅이 위와 같은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면 어떠한 이유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예로 한 제작사에서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에 관련된 사극 드라마를 촬영한다고 해보자. 세종 역에 여성을 캐스팅한다고 했을 때 나오는 세종이 여성일 수 없다는 비판은 성차별적일까? 이것은 아니다. 그저 기본적인 역사 고증에 실패한 미스 캐스팅일 뿐이다. 그 미스 캐스팅은 작품 전체의 몰입을 흐린다. 어느 누가 자신 있게 세종이란 배역에 남배우가 아닌 여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을까? 만약 한다면 오히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인어공주 주인공에 흑인 배우 캐스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어 역할은 오로지 백인만이 가능하고 흑인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어는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어느 국적이어도, 혹은 남성이어도 상관없다. 이번 논란이 단순 흑인은 인어가 '될 수 없다'와 '될 수 있다'의 논쟁이었다면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고, 여전히 굳건한 인종차별주의의 벽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원을 넘어섰다. 앞선 에리얼의 흑인 배우 캐스팅에 비판을 하는 이들은 '#NotMyAriel'을 해시태그 한다. 내가 알던 에리얼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작에서 에리얼은 백인의 빨간 머리 인어였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 알아왔던 그들에겐 흑인 에리얼은 더이상 에리얼이 아니다.
디즈니는 실사 영화를 제작하면서 자신들의 원작 고증을 무시했다. 애니메이션에 고증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한다면 디즈니는 스스로 그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 받아들여야 한다. 좋든 싫든 그들은 애니메이션 원작의 에리얼을 백인으로 설정했기에 하루아침에 흑인으로 돌려놓기까지는 충분한 설명과 근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디즈니는 어떠한 설명과 설정의 변화 없이 흑인 에리얼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소비자의 몫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했다.
디즈니의 이번 캐스팅은 기존의 '인어공주 에리얼은 백인'이라는 패러다임을 파괴하고 인어공주가 어떤 인종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주고는 싶다. 그러나 기존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새 패러다임이 자리잡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인정과 믿음에 의해 선택되어야만 한다. 기존 패러다임은 생각보다 보수적이기에 확실한 반증을 노리기보다는 기존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없는 변칙 사례를 제시하고 해결하는 방법으로 전환에 도전을 하곤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한다는 패러다임은 당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란 패러다임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천문학적 난제를 해결함으로써 결국 지금까지 천문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확고한 위치에 있다.
마찬가지로 디즈니 역시 인어공주 주인공의 인종이 다양할 수 있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에리얼=백인'이란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흑인 에리얼'이란 변칙 사례를 제시했다. 그러나 디즈니는 그 변칙 사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에리얼이 덴마크인이기에 유전적으로 흑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려면 그녀의 부모 둘 중 한 명은 흑인으로, 그리고 그의 조상까지 흑인으로 설정을 고쳐야만 한다.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에리얼이 입양되었다는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 설정이라도 도입해야 하지 않을까? 디즈니는 그런 일말의 노력도 없이 패러다임 전환의 성공을 꾀했고,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깨어있는 제작사란 평가를 받길 원했다.
'왜 갑자기 에리얼이 흑인이야?'라며 설명이 필요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이들의 의견에 '그건 너희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란 답변을 내놓은 디즈니는 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이란 궁극적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되려 그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저 비판하는 이들이 흑인이 인어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라 짐작하며 스스로 더 많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낳았다. 디즈니의 캐스팅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찬성하는 이들은 'No Racism'을 외치는 깨어있는 시민이란 편협한 흑백논리에 수많은 디즈니와 에리얼의 팬들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디즈니의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된 디즈니 팬도 무엇도 아닌 황인종의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