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시에이자 쇼콜라티에입니다.
매번 레시피나 초콜릿에 관한 학문적인 글을 쓰다가 브런치의 많은 글들이 작가의 인생, 일상, 생각에 대한 글로 이루어 진 것을 보고 오늘은 진지한 초콜릿의 초콜릿 여정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브런치 플랫폼의 성향에 대해서 알고 시작은 했지만 초콜릿이라는 주제를 잡고 후반부로 갈수록 개인적이거나 감성적인 부분은 나름 배제하고 글을 쓰고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개인적인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나는 무엇 하나에 꽂히면 정말 징하게 꽂히고 파헤치는데 그 꽂힘이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어릴 적부터 나름 '덕질'을 해야하는 대상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인생을 의미있고 감성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으며 집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삶의 빈 공간들을 메꾸어주었다. 크면서 깨달은 것인데 내가 공허하거나 삶의 의미를 모를 때, 또는 방향을 잡지 못할 때는 푹 빠질만한 집중 대상이 없던 기간들이었던 것 같다.
기억상 아주 어릴 적 내가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미니어처 제작자 또는 조소가였다. 조소는 해본 적이 없어서 배워보고 싶었으나 어떻게 시작조차 해 볼 수 없었고, 미니어처 만드는 건 학생 때 푹 빠져서 취미로 계속 해왔으나 그것을 직업으로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은 사실 아쉬움이 남는 게 꾸준히 했으면 미니어처나 디오라마 제작자로 인생의 의미를 충족시키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결론적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데, 무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잘 모르던 시절,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을 알게 된다. 꽤 오래 전이고 중학생 때여서 당시 우리나라에 흔치 않았던 그 직업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이 없었다. 당시 찾을 수 있는 책이란 거의 다 찾아보고, 인터넷도 항상 샅샅이 뒤져서 읽었던 것 같다.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선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고, 카카오에 관한 글들을 읽고 접할수록 초콜릿이라는 물질이 정말 매력적이고 신기해서 푹 빠지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재료를 사고 온갖 도구를 꺼내어 주방을 어지럽혀도, 어찌나 열정적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지금의 초콜릿 지식과 실력으로 오래 전 그 때의 사진을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지만 '아, 내가 저렇게 푹 빠지고 사랑했었지'하는 생각에 어린 스스로가 조금 귀엽게 보이는 면도 있었다.
난 무언가에 푹 빠지면 그 하나에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긴 한데, 단점은 그 정도로 푹 빠지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싫증을 너무 빨리 느끼고 금방 그만둔다는 점이다. 내 평생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초콜릿말고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고 흔치 않았던 그 당시의 직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원래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학업을 이어나가 대학을 가게 된다. 당시 속으로 혼란을 많이 느꼈다. 내가 진정 하고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 난 왜 그것과 상관없는 학문을 위해 대학에 있어야 할까에 대한 자괴감과 현실의 벽에 많이 부딪히고 그래서 한창 속도 좋지 않았고 막막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다는 장점과 그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난 꼭 쇼콜라티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휴학을 중간에 끼워가며 천천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러면서 초콜릿에 관한 자료도 계속 찾아보고 기회가 되는대로 연습도 해보며 견문을 넓혀갔다.
대학을 다니다 좋은 기회로 벨기에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가까운 이웃나라인 프랑스를 자주 들렀다. 사실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기도 했지만 벨기에가 진입 장벽이 더 낮았고 프랑스와 가까워 자주 오갈 수 있어서 벨기에에 머무르며 프랑스를 자주 들렀다. 프랑스에만 갈 때면 꿈만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초콜릿과 디저트를 파는 샵들이 가는 길마다 있었다(아, 물론 내가 찾아간 길). 마침 유럽에 있는 그 기간에 프랑스 에꼴 발로나에 열린 수업을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때 현역 셰프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멋진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만난 한 한국인 pastry chef님이 계셨는데 이전에는 파티시에(pastry chef)와 제과 쪽으로는 관심도 별로 없고 초콜릿에만 꽂혀있던 내가 그 분을 뵙고 너무 멋있어서 나도 저렇게 멋있는 pastry chef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신 그 셰프님, 아직도 그 때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게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나 스스로의 시야를 넓히게 해주신 분! 덕분에 나는 초콜릿을 집중적으로 하고 싶어도 초콜릿은 영역이 파티스리보다 좁기 때문에 Pastry chef가 되면 시작을 할 수 있는 발판의 기회가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관련 업계의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그쪽으로 인맥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요식업 경력도 없는 이력서를 레스토랑에 넣어봐도 연락이 올리가 없었다. 시작만 하면 잘할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넘쳤는데 시작을 할 수가 없어서 그 때 조금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한 유명 레스토랑에 인터뷰 기회가 생겨 오너 셰프님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포트폴리오와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싶은지, 어떠한 것들을 하고 싶은지 계획서를 작성해 노트를 잔뜩 싸들고 셰프님 앞에서 막 설명을 했었다. 열정을 좋게 봐주셨는지 일을 시작하자고 제안해주셨지만 말씀해주신 시작 날짜가 인터뷰 봤을 때보다 약 4개월 후였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물론 4개월 후에 일을 할 수 있을 것을 알았지만 왠지 그 4개월의 기다림이 막연히 길게만 느껴지고 그 동안 무언가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영국을 갈까, 프랑스를 갈까 고민을 하면서 매일 인터넷으로 해외 유학을 검색해보곤 했다. 그런데 대학을 갓 졸업해서 돈도 없는 내가 부모님 등골을 빼먹으면서까지 비싼 프랑스 제과학교 유학비를 내며 내 꿈을 이루겠다고 고집피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학을 간다고 해도 학업을 마친 이후의 길이 보장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에도 없던 호주 유학이 검색창 관련 검색어에 뜨길래 그냥 클릭을 해보았다. 호주가 Hospitality 업계로는 아주 좋은 것은 알았지만 제과쪽으로는 강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관심이 없었었는데 호주 유학은 비용, 언어, 생활 등 여러 면에서 조건이 괜찮았다. 마침 그 주말에 호주 유학 박람회가 열리고 있길래 그냥 가서 설명이나 들어볼까하고 들르게 되었다.
그렇게 호주로 가게 되었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나를 믿어주고 뽑아주신 유명 레스토랑 셰프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해외로 가게 되어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드렸고 셰프님은 응원의 답변을 주셨다. 그리고 나는 호주로 가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였다. 드디어 Pastry chef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Pastry chef로 일을 하다보니 초콜릿을 다루는 일이 주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초콜릿을 다루기는 하지만 초콜릿만 전문적으로 하는 쇼콜라티에와는 다르다. 그러나 내 진정한 열정은 디저트나 제과보다도 항상 초콜릿이었다. Pastry chef로 일하면서 초콜릿만 하는 곳에서도 일을 해보았고, 시니어 셰프들에게 초콜릿 작업을 하고 싶다고 어필을 했다. 디저트 위주로 작업하는 곳에서는 항상 초콜릿을 다루는 작업을 추가시켜서 하려고 해왔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초콜릿에 내 창의력을 쏟아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료를 사모아서 초콜릿을 주제로 영상을 찍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진지한 초콜릿 유튜브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일에 치이고 해외 거주자로서 비자, 거주지 변경 등 여러 사건들이 항상 생겨 영상을 찍는 일이 종종 미루어 질 때도 있지만 진지한 초콜릿을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만의 작은 초콜릿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달까.
한 번 쇼콜라티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후로 나는 언제나 초콜릿에 푹 빠져있었다. 물론 초콜릿에 대해 잘 알거나 많이 알지는 못했어도 항상 시도해보고, 많이 사먹어봤다. 나중에 내 브랜드를 열면 이제껏 먹었던 초콜릿 포장지들로 방 한 칸 정도의 미니 박물관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내 평생 나는 쇼쿌라티에가 될거야라고 말하고 다녔고 그 꿈을 안고 살았다. 학과를 관련 업종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 왜그리 그 길이 뿌옇고 막막했는지...꽤 오래 걸렸다. 그러나 결국 도착했다. 하지만 이게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도착점은 그 다음 코스를 시작하는 시작점일 뿐이다.
진지한 초콜릿의 초콜릿 여정을 함께 해주시고 지켜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진지한 초콜릿을 계속 응원해주시고 함께 해주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