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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Dec 02. 2022

28. 학이 난다 (1957)

하늘에 떠 있는 학을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감독. 미하일 칼라토초프

출연. 알렉세이 바탈로프, 타티아나 사몰리오바, 바실리 메르쿠례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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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난다> 는 소련 미하일 칼라토초프 감독의 영화이다. 세계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 로맨스 영화로, 스탈린 사망 4년후에 공개되었다. 엄격한 문화적 통제로 영화에서 공산주의적 영웅주의와 국가에 충성하는 애국주의를 보이는 내용을 담아야 했던 스탈린 독재 시절을 거쳐 마침내 정치적 해빙기가 도래하여 전보다 자유롭게 영화 제작이 가능했던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스탈린 사후 전세계에 소련 영화계의 해빙을 알린 첫 번째 영화로 언급되며 1958년에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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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와 보리스라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던 커플이다. 전쟁이 터져서 군대 입대하게 된 보리스는 베로니카의 생일에 그녀를 닮은 다람쥐 인형과 쪽지를 남기고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헤어지게 된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베로니카는 보리스의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다. 평소 베로니카에게 관심있던 보리스의 사촌 마크는 폭격으로 정신없던 어느 밤에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그녀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결국 일방적으로 마크와 결혼하게 된 베로니카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보리스의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면서도 다른 가족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디며 힘든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보리스는 전쟁 중에 적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이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보리스의 가족들과 따로 살던 베로니카는 전쟁 후 어느 귀환 병사에게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영화를 보며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요소가 많았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이다. 이 영화는 어느 장면에서도 허투루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장면이 많았다. 먼저 초반 강변에서 베로니카와 보리스가 함께 있던 사랑스러운 시퀀스에서 물을 맞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기억난다. 먼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을 맡는 모습을 찍은 후 곧바로 흠뻑 젖은 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오는데 여러 시점에서 등장인물을 비추어 역동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해당 장면은 같은 장소에서 베로니카가 치근덕대는 마크에게서 달아날 때 같은 구도로 나타나는데, 비슷한 상황이지만 확연히 달라지는 베로니카의 태도를 보며 확실한 대비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영화에서 군중 사이를 헤집는 베로니카를 담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보리스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다가 내려 군중 속에서 빠져 나와 탱크 옆을 지나가는 쇼트이다. 베로니카를 가까이서 찍다가 거대한 관중 틈 사이를 지나치며 탱크를 향할 때는 점점 거리를 두며 멀어지는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화면 연출이 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입대한 보리스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군중속에서 분투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이다. 그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긴 호흡으로 촬영하는 가운데 보리스를 찾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 속을 헤메는 베로니카의 대비가 안쓰러웠고,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시퀀스에도 비슷한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마찬가지로 감정의 대비가 잘 느껴졌다. 장면 사이의 편집도 독특했다. 마치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한 한 템포 빠른 편집으로 역동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한편 어떤 장면에서는 페이드를 활용하여 고전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구도와 촬영 기법이 각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영화를 더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보리스가 총에 맞아서 쓰러질 때 플래시백을 활용하여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베로니카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한 유명한 장면이 있다. 휘몰아치는 공포심과 함께 소용돌이처럼 돌아가다 쓰러지고 마는 보리스의 시선에서 뒤늦게 그를 구하러 온 동료들의 군화가 보이고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실제로 관객이 보리스가 된 듯 그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이 사실감을 더해서 깊은 감정이입을 도왔다. 전쟁 중에도 베로니카의 사진을 품에 지니며 늘 그녀와 함께 보내는 행복한 시간을 상상했던 그이지만, 베로니카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 다람쥐 인형에서 쪽지를 발견하여 미처 알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인사를 접하고 만다. 보리스가 입대할 때 만나지 못했던 둘은 결국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 기구한 운명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서 어쩌면 국가(체제)와 베로니카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사서 같이 사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던 베로니카에게서 억압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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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상황이 한겨울 부상자 병원을 오가던 사람들의 모습처럼 쓸쓸하고 차갑게 느껴지지만, 어떤 다리에서 보리스란 이름의 3살배기 고아를 찾아온 이후부터 감춰졌던 사실들이 서서히 드러나며 베로니카의 상황이 나아진다. 보리스의 아버지의 따스한 인품 또한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이다. 마크가 자신을 속여 보리스를 남겨두고 군 면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집에서 내쫓는데, 자식을 전쟁터에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언급한 부분이 너무 가슴 아팠다.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베로니카의 곁을 지키며 끝까지 그녀를 위로해주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희망적인 베로니카의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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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감명 깊게 봤던 한 장면만 보고 감상하게 된 영화인데 기대를 훌쩍 넘는 뛰어난 작품성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소련, 혹은 소련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가의 이미지가 부각되어서인지 그 나라의 사람들 또한 냉혈한일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전세계 어느 시대에서나 통하는 것 같다. 신파와 거리가 먼 것 같은 소련이지만 그들도 결국 같은 감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소련 혹은 러시아 영화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 외에는 거의 접해보지 못했는데 해빙기 시절 다른 작품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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